1부. 계절의 경계
자살유가족들이 죄책감을 많이 가지는 이유는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아픔을
알아주지 못했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죽기 반년 전부터
분명히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아니,
알아차릴까 봐 더 불안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낮,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뜬금없이 연탄 이야기를 꺼냈다.
“어젯밤에 너무 힘들어서 연탄을 샀는데,
내가 죽으면 너보다 손녀들이 더 힘들까 봐,
집안이 망할까 봐 못 죽었다.”
웃으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가볍게 들리지 않았어야 했다.
그 전화의 의미는
아마도 ‘많이 힘들다’였을 것이다.
위로를 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그 후의 대화들 속에서는
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전화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아빠의 웃음과 허탈이 섞인 목소리,
말 뒤에 남아 있던 공기만은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지금도 그 장면은 반복해서 떠오른다.
그날의 전화는
내가 가장 오래 붙잡고 있는 장면이다.
그때 내가 알아차렸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이 그렇게 힘드냐고,
지금 바로 가보겠다고
말 한마디만 했더라면.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만약 그때 다르게 말했더라면,
아빠는 죽음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뒤에도
나는 위로 대신
같은 선택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