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죽음에 대해 말하다가,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빠의 죽음을 이해하려 애쓰던 시기가 있었다.
왜 그 사람은 그렇게까지 몰렸을까.
왜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왜 내 블로그를 찾는 이들은 이렇게 많은데,
우리 아빠는 끝내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을까.
아빠를 보낸 뒤로
‘자살’이라는 단어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었다.
뉴스를 보다가도, 캠페인을 스치다가도
자연스럽게 예전 기사부터
하나씩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은
이미 기사와 통계를 통해 익숙하게 알려져 있다.
특히 청소년이나 10~30대의 자살률은
늘 심각하게 다뤄진다.
그런데 2024년 통계 자료를 보던 중,
나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 시선이 멈췄다.
자살률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40대 남성에서 시작해 50대,
그리고 그 이후로 갈수록 더 높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이유를 들여다보니
경제적인 문제, 직업 상실,
가족 간의 갈등 같은 말들이 반복해서 등장했다.
그리고 거의 빠지지 않고 덧붙여진 설명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고, 정신과 치료나 도움 요청을
쉽게 선택하지 않는 세대라는 것.
그건 그들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실패라기보다
한 세대가 오랫동안 견뎌온 방식의 문제처럼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는 늘 일만 하는 사람이었다.
말이 없었고, 먼저 연락을 해도 살갑지 않았다.
“아빠, 왜 맨날 TV만 봐?” 하고 물으면
그는 “아니야”라고 말하거나
살짝 웃기만 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게 그냥 ‘아빠라는 사람의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야깃거리가 없어서, 어색해서 그렇다고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아빠의 일생을 가만히 그려보면
한평생 ‘일하고, 버티고, 잠드는 법’만
배운 사람처럼 느껴진다.
힘들다는 말 대신 침묵을 선택했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이제 와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건 아빠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그 세대가 살아온 방식이었다는 걸.
아빠의 죽음을 생각하며
나는 비로소 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서
한 세대를 이해하려는 질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조용히 나 자신에게도 돌아왔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