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안다.
세상에서 다시 만나 손잡고 이야기 나눌 수 없는 슬픔은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이, 고인에게 미안할 정도로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내가 처음 경험했던 죽음은 외할머니의 것이었다. 언젠가 언급한 적 있듯, 그녀는 오랫동안 치매를 앓았고, 자녀들 집을 돌아가며 지내셨다. 우리 집에서 지내시는 동안 고관절 부상을 당해 침상 생활을 하시다가 고상했던 젊은 시절과는 너무 다르고 초라하게 돌아가셨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하지만, 나는 외할머니의 장례 후, 집에서 더 이상 병원 냄새가 나지 않아 한편으로는 후련해했던 것 같다. 이기적인 아이였다. 만화가셨던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처녀일 때 돌아가셨으므로 나는 뵌 적조차 없었다. 여담이지만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엄마와 엄마의 가족들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심과 동시에, 그의 제자들이 재산을 거의 빼돌린 탓으로 급격하게 어려워진 경제 사정을 떠안아야 했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이 때문에 한동안 자식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었던 것 같다. 실리에 눈이 밝은 분은 아니었다. 지금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이 상황을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던 사람은 그녀였을거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제법 나이를 먹어 알만한 나이였으므로 가슴이 저몄다.
그때 우리 부모님은 헤어져 따로 살고 계셨다. 우리 집에서 모시다 모종의 이유로 엄마 아빠가 헤어지시고,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가정 요양원에 계시던 할머니는 아마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셨던 것 같다. 어느날인가 할머니를 뵈러 가야 한다는 아빠를 뒤 따랐다. 외대앞인지 경희대앞인지 좁은 골목에 연립주택들이 줄줄이 늘어선 곳에 2층짜리인가 가정집을 요양원으로 운영하는 곳이었던 듯하다. 한 손에 폭 안을 수 있을 것만 같이 자그마해졌던 할머니에게 우린 작별인사를 했다.
며칠 뒤, 이제 고인의 시신을 수습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역설적이게도 한동안 소원해 연락을 하지 않던 아빠의 형제들이 모였다. 그리고 아빠와 작은 아버지, 고모들께서는 지금도 흔치 않은 사이좋은 형제 지간으로 지내고 있다. 아마도 이건 할머니가 곁을 떠나며 모두에게 내린 '명' 같은 것일게다. 아니 그보다는 우리에게 주고 가신 ‘선물’인 것도 같다.
할머니는 꽤나 포악하고 평생 일이란걸 할 줄 모르는 할아버지의 술시중을 들며, 가락시장에서 오랫동안 생선가게를 운영했다.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들 둘에 딸 셋 까지 잘 키워 시집장가 보내셨는데, 내 기억에 말년에는 할아버지와 이혼을 하고 싶어 하셨다. 그때가 할머니 나이가 칠순이 훌쩍 넘은 때였다. 자식들은 그 나이에 이혼이 흉하다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고, 지금이라도 뜻대로 하시게 둬야 한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나이 들고 보니 혹시 성격이 꽤나 괴팍하셨던 할아버지의 거취때문에 다들 말렸던게 아닌가하는 못된 생각도 든다. 그렇게 노년의 이혼이 성사되니마니하던 때에 아마도 아무도 모르는 새, 할아버지의 몸은 제기능이 어려워졌다.
어릴 때부터 장남의 외동딸이었던 나는 친가에서 그리 고운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명절에 할머니댁을 가면 일박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오기 일수였다. 나도 보통 성질은 아니지만, 아빠와 할아버지는 몹시 불같은 면을 타고났는데, 할아버지는 외동인데 딸손녀인 내가 꽤나 꼴보기 싫으셨는지, '아들자리 안 팔았다', '쟤는 뭣 때문에 눈을 치켜뜨는거냐', '꼴보기 싫으니 방에 데려가라', '니가 뭘 할 줄 안다고 음식 하는 엄마를 방해냐'시며 사사건건 열 살도 안된 나를 뭐라했다. 옛날 분에게 외동 장손녀는 눈엣 가시였을까? 자의뿐 아니라 타의로도 나를 사랑하기만 해 주시기는 어려웠던 건 아닐까? 작은 아버지 마저 딸 하나만 낳고 말겠다고 했을 때, 그 화살의 목적지는 나와 엄마였다.
평생을 끼니는 소주안주 뿐이셨던 분의 건강 상태는 굳이 검사하지 않더라도 알만했다. 그리고 그는 꽤 대쪽같은 양반이었다. 어느 날 어떤 이유였는지 쓰러진 할아버지는 병원에 가서도 검사도 전부 거부하시고 난동을 피우시는 통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곡기를 끊었다. 물도, 그 좋아하시던 술도 드시지 않았다고. 그리고 돌아가셨다. 식사도 치료도 거부하신지 일주일 만이었다.
구정 설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 날이 추웠다. 기골이 장대하던 나의 할아버지는 쓰러져 병원에 다녀오신 후 조용히 이불을 덮고 누워계시더니 얼마 안가 한줌의 재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어떤 인간이든, 예외없이, 모두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며, 육체가 사라지는 것은 그저 많이 가벼워지는 것 뿐이라 생각하고 산다. 하지만 그때 어렸던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보며, 한 줌의 재가 되는 인생의 무의미함에 대해 많은 상실을 느꼈고, 고인이 되시기 전에 나라도 손 한 번 잡아드릴 걸 하고 오랫동안 후회했다. 그리고 부싯돌처럼 불꽃을 튀여가며 할아버지와 부딪히던 아빠는, 그분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동전 몇개를 어루만지며, 장례 마지막 날 많이 울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마지막 책임감이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평생의 업을 모두 마쳤다는 듯이 할머니에게도 병이 찾아왔던 것이었다.
나는 조부모님과 따로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 분들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어렸고, 상을 치르느라 바빴고, 손님을 맞고 상을 차리고 상을 치워야 하는 자리였기때문에. 나에게 지난 세번의 장례는 슬퍼할 겨를도 없고 정신만 쏙 빠지는 3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매일 아침 이제 자글자글 해진 눈 밑의 잔주름을 보면 할머니를 닮아 깜짝 놀라고, 발가락을 찧고 외마디 욕설을 뱉을 때면 한 번도 사랑한다 해주지 않던 할아버지도 떠오른다. 그리고 탄력을 많이 잃은 내 살을 보다가, 만지작거리면 잠이 솔솔 쏟아지던 외할머니의 팔뚝도 그리워진다. 이제는 전할 수 없는 편히 쉬시라는 말을, 차곡차곡 모으다 보면 나중엔 전할 수 있을까.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