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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Feb 28. 2022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노산, 초산 임신과 출산 이야기




 지난 해 6월이었다. 우리는 휴가중이었고, 여권 연장 차 시드니에 방문한 참이었다. 여권 연장이 주 목적이었던건지, 친구들 만나 광란의 밤을 보내는 게 주 목적이었던건지. 먹기도 마시기도 많이 한 휴가였다. 그래서 피곤한거라고, 숙취때문에 오래 자는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작년은 내게 유난히 예민하고 피로를 쉽게 느낀 해였다. 별일이 아닌데도 쉽게 화가났고, 감정조절에 어려움을 느꼈으며, 몇년간 잘 적응하고 있다고 믿었던 내 직업에도 회의감이 들었다. 얼마나 더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로 바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었다. '아, 지금 양파 대신 손가락을 잘라야겠어!'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곧장 주방에서 뛰쳐 나가야함을 알아차렸다. 직업적 자긍심, 어른의 책임감, 수치심과 같은 단어들로부터 나를 먼저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자발적으로 내 경력을 단절시켰다.


 산책을 다녔고, 사진을 찍었다. 수경재배로 양파도 기르고 고구마도 길렀다. 식물을 키우는데 소질이 없는 나는 물이나 흙에 심는 족족 다 죽게 만들었지만, 매일 싹이 나오는 것도 잎이 파랗게 올라오는 것도 신기하고 소중했다. 내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병원의 도움 없이--사실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받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으로 가는 것도, 내 나라 언어가 아닌 말로 상담을 받는 것도 어느하나 자신이 없었다.--우울감에서 빠져나와 경제적인 이유로 현실과 타협해 내정된 자리를 만들어 놓고 남편도 휴가를 받아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양파의 몸통이 물에 잠기면 쉽게 썩는단다. 그나마 잘 자라주어 두어번 파대신 잘라썼던 고마운 양파.


 우리부부는 암묵적으로 딩크족인 상태였고--사실 내 남편은 울며 겨자먹기로 수긍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코로나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고 하루에서 수십만명씩 고통 받는 상황에서 굳이 2세를 만드는 것에 의미를 느끼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한달의 반은 PMS로 고통받았고, 나머지 반은 생리통으로 고통받는다는 이유로 부부관계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다. 내 생리 주기는 21일정도로 점점 짧아지고 있었고, 나도 엄마처럼 사십대 초반에 갱년기가 오는 건 아닌가하는 걱정이 되었다. 안가지는 것과 못가지는 것은 차이가 있지 않느냐며 친구들에게 하소연했고, 남편은 자기에서 대가 끊긴다며 서운해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MACKAY라는 지역은 케언즈와 브리즈번 사이에 위치한 퀸즐랜드 북동부의 해안도시이다. 남편이 직장의 오퍼를 받아 2년전에 케언즈에서 이주하게 되었다. 케언즈에서는 1년 반 정도 거주했었고, 그 전까지는 시드니에 오래 발을 붙이고 살았다. 때문에 휴가지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있는 시드니였다. 때마침 여권도 연장했어야 했다.--가까운 브리즈번에도 한달에 한 번 방문영사가 오긴하지만 코비드 상황때문에 한 번 전면 취소 된 경험이 있어 영사관이 상주하는 시드니행을 결정했다.-- 휴가는 즐거웠다. 한인이 거의 없는 거주지 특성 상 한국 음식은 레토르트로 만족하거나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재료부터 만들어 먹어야 했는데, 시드니는 별천지였다. 한국 치킨집, 떡볶이, 짜장면에 소주, 활어회에 서로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까지 없는게 없었다. 한국에 못가는 대신 치고도 꽤나 괜찮은 조건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음주에 가무에 늦잠과 피로는 덤이었다. 머리만 닿으면 꾸벅꾸벅 잠이왔다.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지. 집에 가면 김치찌개도 김치를 만들어야 먹을 수 있잖아?! 그렇게 시국걱정도 하지 않고 일주일이 지났다.


 집에 돌아오는 비행 일정이 었었던 6월 24일, 우리는 집에 오지 못했다.


 시드니에 델타변이 확진자가 확인되었고, 우리가 머물렀던 대부분의 지역이 핫스팟으로 지정되었다. 23일 이후 퀸즐랜드로 주이동을 하는 모든 사람은 레지던스 포함 전원 호텔격리가 확정되었다. 브리즈번 공항에서 당연히 통과될 줄 알았던 사람들은 더러는 울기도 하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한시간 반만 더 비행을 하면 집에 갈 수 있는데... 경찰의 호위? 감시?를 어설프게 받으며 호텔격리가 시작되었다.


 하루세번 배달되는 밥을 받거나, 이틀에 한번 PCR 검사를 받거나, 세탁물을 내놓는 것 이외에는 문을 여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살짝 문을 열고 복도를 한번 둘러봤다고 방으로 전화가 왔다. 필요한게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답했다. 하루 세번 주어지는 식사에서 먹을만한 건 물과 주스 정도였다. 향신료가 강한 음식들 뿐이어서 우리는 하루에 한 번은 배달음식을 먹었다. 이런 음식에 바깥공기는 쐬지도 못하는 열리지도 않는 대형창이 있는 화장실과 욕실이 딸린 원룸형 호텔에 집에 넣어 놓고는 한사람당 1800불을 받다니 날강도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라도 그 돈을 지불할 생각을 하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미리 말하자면 계산서는 6개월이 훌쩍 지나서야 날라왔고, 이런저런 이유로 보류되어 있는 상태여서 결과적으로 얼마를 지불하게 될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 그래서인지 배가 사르르 아파왔다. 나는 원래 성질이 고약해서 심기가 뒤틀리면 몸이 먼저 아프고는 했다. 그런 이유려니 했다.' 아! 격리 기간 사이에 생리 에정일이 껴 있어 시드니 뜨기 직전에 생리대도 사두었었지.', '휴가덕에 PMS는 잘 넘겼는데, 너무 피곤했었나 좀 늦어지네.', '잠깐 요근래 사나흘 이상 늦어진적이 있나?', '뭔가 이상한데 위험한 날은 없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확인해서 나쁠 것 없지.'




 양성이었다. 집도 아니고 격리중에 호텔에서 약국으로부터 배달로 받은 임신테스트기였다. '이놈의 생리 지겨워 죽겠다. 애기 가지면 일년은 안하는거 아니야?', '일가기 싫어 죽겠다. 애기 가지면 일년은 일 안해도 되는거 아니야? 하는 핑계를 댈 때마다, 생리하기 싫어서 일하기 싫어서 한 생명을 세상에 던져 놓을 수는 없는거다 생각하고 쉽게 말하지 말자며 다잡고는 했었는데... 혼란스러웠다. 당장 다음주부터 일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설명하나, 엽산을 먹으라던데 뭐가 더 필요한가, 이 나라는 산부인과가 따로 없다던데 병원 검진은?, 우리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겁도 없었다. 벌어질 일들은 알지도 못하고 맛 없는 호텔 조식을 의무감에 목구멍으로 집어 넣으며, 그냥 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리고 9개월이 흘렀다. 2022년 올해 나는 우리나이로 서른 여덟이, 내 남편은 마흔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곧 부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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