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
#유럽 #여행 #이탈리아
나는 왜 여행을 떠나고 싶었을까!. 나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였을까!. 꼭 가보고 싶었던 이탈리아 여행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상을 보고 느끼고 싶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친구야! 밀라노 가자'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유학을 온 친구들은 하나둘씩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왕복 비행기 티켓 비용이 아까워 한국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매일 아침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고 기름 냄새 풀풀 나는 햄버거 가게에서 종일 서서 일을 하느라 두 다리는 퉁퉁 부었고 허리통증은 고질병이 되어갔다. 어느 날 유난히 힘이 들고 지칠 무렵 친구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야 우리 이탈리아로 여행 갈래?" 친구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나는 철없는 친구의 제안을 외면하려고 아르바이트 핑계를 대며 친구를 한동안 피해 다녔다. 나는 여행 제안을 잊어버리려고 일에 열중하며 애를 썼으나 내심 친구의 전화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친구는 그런 내 심경을 눈치챘는지 부모님에게 여행 경비를 요청했다며 나를 설득했다.
90년대 일본의 HIS 여행사는 유럽 노선 상품을 주력으로 온갖 매체에 여행상품 홍보에 나섰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롯데그룹이 HIS여행사와 협약을 맺고 소공동에 위치한 롯데호텔 내에 한국지사도 오픈했다. 80년 90년대 일본 여행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던 시기였다. 우리 또한 이탈리아 여행 패키지상품을 예약하고 약 30여 명과 함께 이탈리아 일주를 떠나게 된 것이다. 여행 일정은 총 9박 11일 12월 23일 출발하여 1월 초에 일본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코스는 밀라노 공항 인 아웃이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여행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번도 유럽 여행을 가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어떤 것을 가방에 넣어야 할지 몰라 매일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유럽여행은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매일 밤 짐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는 일상이 되었다. 드디어 출발 당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서둘어 짐을 부치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밀라노 아침이 밝아오고 거리에는 온통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이 반짝거렸다. 한 손에는 커피를 또 한 손에는 자전거 페달을 밟아가며 여유 있는 모습으로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적한 아름다운 거리에 홀려 순간순간을 열심히 담으려 나의 손가락은 분주했다. 여행사 직원의 정보대로 12월의 밀라노 날씨는 찬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였다. 차가운 바람을 막아보려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등과 발바닥에 핫팩을 여러 정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찬바람을 막는 데는 소용이 없었다. 매일 투어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담아 몸을 녹이느라 친구와 나는 가위바위보를 해야만 했다. 유럽은 그때나 지금이나 뜨거운 물이 넉넉히 나오는 곳은 아니다. 따듯한 패딩을 입고 잠을 자야만 했고 온몸에 파스를 붙여가며 잠을 청하는 것이 여행의 일상이 되고 말았다.
밀라노 도시는 유난히 카페가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추위의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 친구와 나는 밀라노 뒷골목을 서성거렸다. 모퉁이에 작은 카페를 발견하고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람들은 모두 서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모습조차도 어찌나 멋있었는지. 우리는 사람들이 왜 서서 커피를 마시는 줄도 모르고 습관처럼 의자에 철퍼덕 앉았다. 종업원은 우리에게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고 메뉴판을 내밀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카페 라페 두 잔을 주문했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결재를 하기 위해 사인을 보냈다. 종업원은 계산서를 조용히 테이블 위에 놓고 가버렸다. 아뿔싸 친구와 나는 계산서를 확인하고 눈동자가 마주쳤다. 우리는 그제야 왜 손님들이 서서 커피를 마셨는지 알게 되었다. 유럽은 대체적으로 서서 마시면 커피 가격이 싸고 앉아서 마시면 서비스 가격이 추가되어 두 배가량 지불해야 하는 시스템을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다. 어쩐지 친절하더니! 친구와 나는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다는 만족감으로 카페를 나왔다.
이탈리아는 명품의 원산지답게 패션의 출발지라고 불리는 도시다. 지금은 우리나라기 어느 부분에서는 앞서 가지만, 20년 전에는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들은 하나같이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라야만 디자이너 실장 인정을 받았던 시기였다. 밀라노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마치 영화에 나올법한 연예인 비주얼이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큰 키에 날씬한 몸매에 패션 감각은 모두 모델로 착각할 정도였다. 특히 밀라노 지역은 부드러운 양가죽이 유명한 곳이다. 가죽에 색을 입히는 공정과정에 절대적인 노하우가 있다는 전설이 있다.
100년의 장인 정신이 깃든 양가죽 컬러에 빠져 나는 가죽장갑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숍을 소개받았다. 상점 주인의 아버님이 가죽공장을 하고 따님은 장갑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상상했던 대로 내부 공간은 온통 가죽 장갑분이었다. 노란색 핑크색 초록색 파란색 등등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 그 자체였다. 나는 그곳에서 겨자색과 빨간색, 검은색 장갑을 싸게 구입했는데 훗날 10년 동안이나 착용할 줄이야!.
밀라노 광장 두오모 성당 주변에는 또 하나의 놀랄만한 예술 작품이 있다. 빨간색 상징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바로 페라리 자동차다. 보기만 해도 흥분이 되고 한 번 만져보고 싶은 페라리 자동차는 마치 장난감처럼 보였다.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우리를 향해 직원이 다가왔다. 나는 순간 사진을 찍으면 안 되는 곳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직원은 엄지 척을 하며 우리를 향해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훤칠한 큰 키에 멋진 슈트를 입은 직원은 꼭 모델 같았다. 영혼마저 빼앗길 것 같은 강열한 빨간색에 압도되어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나온 나는 그제야 생각했다. "도대체 이런 자동차를 누가 탈까?" 친구와 나는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호텔로 돌아와 종일 있었던 별난 모습을 떠올리며 이탈리아 사람들을 험담하기 시작했다. "이곳 사람들 정말 미친 거야"
꽃의 도시라 불리는 피렌체 도시에 도착했다. 피렌체 도시는 2001년 개봉한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특히 가장 멋진 장면은 두오모 성당 전망대에서 두 연인이 다시 만나 재회를 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두오모 성당을 빨리 올라가고 싶었지만 꽤 높은 곳까지 오르기 전 허기진 배를 먼저 달래기로 했다. 성당 주변을 둘러보니 딱히 먹을 만한 곳이 없어 성당 뒤편으로 돌아갔다. 중국요리를 파는 곳도 있었고 동남아 음식을 파는 곳도 있었지만 이탈리아에 온 이상 당연히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 우리는 작고 허름한 식당을 선택해 종업원으로부터 추천받은 시그니처 메뉴를 주문했다.
우선 큼직한 마르게리타 피자 한판이 나왔고 연이어 검은색 물감을 흠뻑 뿌린 것 같은 파스타가 나왔는데 순간 이게 뭐람! 친구는 두 눈을 크게 뜬 내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거 오징어 먹물 파스타라는 거야" 친구는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지만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파스타에 쉽게 포크를 가져갈 수 없었다. 종업원은 그런 나를 한 참 지켜보다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며 얼른 먹어보라고 권했다. 처음 먹어보는 오징어 먹물 파스타 맛은 의외로 고소하고 깊었지만 시커먼 색감이 역시 불편한 음식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떻게 파스타에 오징어 먹물을 넣고 요리를 할 생각을 했을까? 오징어 먹물 파스타 요리는 고급 요리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탈리아 여행에서 쉽게 주문할 수 없는 파스타가 되어버렸다. 한국처럼 오징어를 통째로 쪄서 먹는 오징어 찜 요리가 훨씬 더 시각적으로 좋고 맛도 좋지 않은가!. 언젠가 음식 다큐프로그램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의 미각에 대한 것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한 여인은 인터뷰 과정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의 맛에 대한 규정을 이렇게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 속에 미각을 타고났어요".
1998년 당시 이탈리아의 모습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야말로 타임머신을 타고 어딘가 툭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표현이 불가능한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지고 나니, 한편으로 공감할 수 없음에 속이 상했다. 고풍스러운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은 한 가문의 집이었다는 것도 실감 나지 않았고, 최하 몇백 년 동안 인간의 손에 완성된 성당 건축은 더욱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이탈리아 국민들은 조상을 잘 만났어!" 친구와 나는 여행하는 내내 중얼거렸다.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한동안 아르바이트를 쉬었다. 시차 적응 문제도 있었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과연 이대로 사는 게 최선일까! 무기력 감에 빠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물론 학비 문제로 아르바이트는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생각보다 여행 후유증이 심했다. 3개월이 지나고 여행이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친구와 나는 다시 이탈리아로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동안 이탈리아 동, 서, 남, 북을 휩쓸고 다니며 본격적으로 카페 Cafe사업의 눈을 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