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샘 Feb 03. 2020

나의 아저씨

퇴사하고 세계여행 다녀왔습니다. 퇴사하면 완생인가요?



“이번 신정 연휴에 <미생>을 정주행 했습니다. 보는 내내 저의 회사 생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올해는 좀 더 선후배님에게 잘하고 일을 스마트하게 하는 한 해로 만들겠습니다.”


사회생활 3년 차 시무식에서 뱉은 말이다. 전 회사에선 본부 소속 직원 약 백여 명이 모여 한 명씩 돌아가며 신년 포부를 밝혀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회생활에 덜 찌들었을 적의 귀여운 포부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많은 직장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미생>. 2013년 취업했을 당시 연재 중이던 웹툰을 다 읽고, 추후 종이로 출간된 만화책 13권 전집까지 구매하는 덕질을 감행했다. 모범생 기질이 발현된 건지, 너무 회사생활에 심취했던 건지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그나마 중고서점에서 저렴하게 구매해서 덜 아깝다. 프로덕질러답게 그 후 나온 드라마까지 시청했다. 그리고 2018년 퇴사를 하며 전집은 다시 중고로 되팔았다. 나에겐 이제 아무 쓸모없는 이야기라 여겼기에.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우연히 남편 외장하드에 있던 드라마를 근 4년 만에 다시 보게 됐다. 인도 여행 막바지로 요르단 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때였다. 드라마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요르단 장면만 보고 끄려 했지만 홀린 듯이 인도에서 몰디브, 그리고 스리랑카로 넘어가서까지 매일 밤마다 정주행 했다. 퇴사한 백수 둘이 도대체 방구석에 박혀 이 드라마는 왜 보고 있는 건가! 네 번째 보는데도 백수조차 울고 웃게 하는 원작의 탄탄한 스토리에 무방비로 빠져들었다. 백수 신분으로 보니 더욱 짜릿했다. 과거의 내 이야기를 제3자로 관찰하는 것 같았다. 사내정치를 할 필요도, 잘 보일 사람도 없으니 3인칭 시점으로 감정이입도 했다가, 장그래가 수모를 겪는 과장된 장면에서는 혀도 끌끌 차며 몰입했다. 무엇보다 ‘나는 저런 회사원이 더 이상 아니다’라는 안도감에 더해져 ‘나도 저렇게 동지애를 느끼며 열심히 일하던 때가 있긴 했지’라는 꼰대스러운 감정마저 불러일으켰다. 특히 자발적으로 즐거워하던 일을 위해 어두운 사무실에 남아 느꼈던 뿌듯한 공기까지 반갑게 다가왔다. 백수인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 없이 한가했던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스리랑카에서 변변찮은 인터넷으로 미생을 볼 줄이야.



이런 차 밭을 놔두고 어두워지면 곧장 침대로 들어가 미생을 정주행했다.



20화까지 마치고 나서 두 가지 화두가 마음속에 남았다. 우선 주인공들이 야근을 마치고 구워 먹던 곱창이 미친 듯이 먹고 싶었다. 일차원적인 욕구 다음으로 든 생각은 이거였다. ‘퇴사한 나는 완생일까?’ 이전 세 번이나 봤을 때는 들지 않은 화두였다. 늘 미생일 줄 알았으니까.


“처음 하는 사회생활에 실수투성이었던 인턴 시절, 힘든 감정 부침도 많았지만 이때 습득한 능력으로 첫 직장에서는 가진 것에 비해 과분하게 대해주던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과 일로 감정 소모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좋은 추억으로 자리 잡은 첫 직장. 궁극적으로 뭐든 간에 안 좋은 기억은 미화되고 좋은 추억은 더 깊게 자리에 남는다. 하지만 그 자리로 절대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다. 끝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서른 살에 퇴사를 결정한 건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 “

-2019.3.9 토요일 일기
 [몰디브에 온 미생]-




입사 후 퇴사까지 5년 3개월 동안 직무도, 담당하는 제품도 바뀌지 않았다. 늘 같았던 환경은 하나라도 새로운 걸 배워야 할 나이에 현실에 안주하는 무딘 성격을 만들어버렸다. 꿈 많고 패기 넘치던 눈이 반짝이던 어린이는 없어지고 변화와 도전이 두려워진 어른이만 남았다.


익숙하고 편한 나의 제품들이 싫으면서도 좋았다. 거의 전 세계에 지사가 있는 탓에 내가 담당했던 제품은 아프리카와 남미에서까지 보였다. ‘우리나라는 법규 때문에 팔기 쉽지 않았는데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잘 팔고 있지?’부터 ‘이 제품을 이렇게 응용해서 쓰고 있다니, 그렇게 찾아 헤매던 해외 사례가 여기 있네’까지. 자꾸 과거의 내 것이 눈에 밟혔다. 이젠 내 것이 아닌데,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 그는 나를 잊었는데 일방적으로 애착관계를 유지했다. 습관적으로 사례 수집용으로 사진이 찍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그 사진을 후임자에게 보내줘야 할 것 같았다. 싫다고 뛰쳐나와놓고 질척거리는 모양새였지만 5년간 몸에 밴 습관은 무서웠다. 결국 제품이 보일 때마다 열 번 중 반은 참았고, 세 번은 사진을 보냈고, 마지막 두 번은 안부만 물었다. 담당하던 제품들은 제품 주기가 길었던지라 내가 하다 만 일이 어떻게 되어있는지조차 궁금했다. 다행히 궁금증으로만 남기고 찾아보진 않았다. 할 일이 없어도 유분수였다.

사실 내가 5년 동안 같은 제품을 담당한 건 명함도 못 내밀 축에 속한다. 전 회사는 웬만하면 한 번 입사한 팀에서 이동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유례없이 오랜 시간 동안 팀을 맡았던 예전 상사는 결국 변화의 바람을 맞고 팀을 옮기셨다. 하지만 이동 후에도 매 달 우리 팀의 실적을 궁금해하고, 심지어 매일 매출을 볼 수 있는 사이트에 접속해 확인까지 하셨다. 그렇게 IT와 안 친해서 팀원들을 귀찮게 하시더니 이런 건 또 어떻게 알고...... 월 마감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분을 만났다. 그리고 또 안부를 가장한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 A 고객은 이번 달에 매출을 얼마나 했냐, 아직 이번 달 목표치에 70퍼센트밖에 못했던데 마감은 잘할 수 있겠냐 등 본인의 일처럼 궁금해하셨다. ‘이제 그냥 잊고 그 팀에서 잘 지내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미생이 그럴 수 있나. 미소 지으며 얼버무려 넘기고 있는데 그 대화를 듣던 옆 팀의 노련한 부장님이 도와주셨다. “아니 헤어진 여자 친구 페이스북 보는 것도 아니고 이미 떠난 팀인데 뭘 그런 거까지 보세요? 이제 그만 잊고 놔주세요.” 아, 콜라 한 캔을 원샷한 것처럼 시원했다. 그리고 이젠 안다. 내가 그 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싫었던 순간이 많았지만 쉽게 애착이 끊어지진 않는다는 것을.  




스리랑카의 완생, 미생?




퇴사하고 한 달 후 떠난 세계여행이었다. 아시아 여행을 할 때는 심심찮게 꿈에 회사가 나왔다. 미생을 볼 때쯤엔 꿈에 덜 나왔지만 다시 드라마를 본 이후로는 또 다른 감정이 휘몰아쳤다. 회사는 나를 잊었는데 나만 질척이는 것 같다. 그리고 종종 장거리 이동을 할 때면 나의 아저씨들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나는 팀에서 처음으로 뽑아본 유일한 여사원이었다. 이 제품은 거칠어서 여자는 안돼, 영업사원으로 여자는 더군다나 더 안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2013년이었지만 회사의 여성 우대정책 덕분으로 채용됐다. 5년이 지나 퇴사를 할 때까지 여자 직원은커녕 후배도 들어오지 않은 비운의 팀이었다. 기본 10년 이상은 같은 팀에 있던 나의 아저씨들은 남자 사원이었다면 욕하면서 가르쳤을 일을 내가 상처 받지 않게 힘들고 어렵게 가르쳐주셨다. 5년 동안 답답했던 적이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감사했다. 병보다 약을 많이 주었고, 가끔은 너무 약을 많이 줘서 약발에 취해 버릇없이 굴어도 혼내지 않고 넘어가 주셨다. 지금도 연락할 정도로 친해진 덕에 술자리나 담배를 태우며 할 법한 재밌는데 여자 사원이 잘 못 들을 이야기들을 술술 전해주셨다. 그럼에도 같은 우물만 오래 판 선배들에게 배우는 게 적다며 불평했고,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고 싶은데 매번 순대국밥을 먹는다며 입이 튀어나왔다.

회사를 나와도 이제 나는 빵보다 밥과 국을 찾는 아재 입맛이 되었고, 처음 만나는 아저씨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아줌마가 되었다. 질리고 미워했던 순간도 많았지만 미웠던 마음은 길 위에서 멍을 때릴 때리며 생각을 할때마다 하나씩 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들과 함께 팔았던 제품을 볼 때마다 마음이 몽글몽글 풀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린 날의 투정이었다. 미움에 마음 한 켠을 내어주는 건 행복한 여행길 위에선 아까웠다. 이 글을 통해 미워했던 나의 아저씨들에게 비로소 감사 인사를 건네게 되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written in Arequipa, Peru 2/2/20

매거진의 이전글 백수의 신년 목표는 책 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