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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샘 Apr 19. 2020

이럴려고 나왔나 자괴감들어

매순간이 죄책감. 백수 길티(guilty)

세계여행 종료 D+30



이럴려고 나왔나



세계여행나와서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마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미드를 볼 때는 그나마 영어 공부를 핑계삼아 시간을 축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한국 드라마는 볼 때마다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국에서도 거의 안 본 드라마를 세계여행나와서 보고있다니. 게다가 철 지난 드라마를 뒤늦게 보는데 재밌어서 머릿속이 온통 드라마 생각뿐이라면?


스리랑카에서 <미생>을 보면서는 퇴사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 구십 번쯤 했다. 과테말라에선 <동백꽃 필 무렵>을 정주행하며 게장이 너무 먹고싶어 한국행을 손꼽아 기다렸다. 페루에서 한참은 지난 <미스터 션샤인>을 보며 남편과 사극체로 대화를 했다. 과몰입해서 다른 한국인 여행자들이 있는 곳에서도 “내 오늘은 김치볶음밥을 먹겠소” 따위의 대사를 하느라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다. 대미는 <스토브리그>와 <이태원 클라스>아르헨티나에서 코로나때문에 숙소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무려 두 편을 봤다. 박새로이가 조깅하던 녹사평 육교에 가보고 싶었고, 프로야구가 개막하면 야구장에 가서 신나게 응원을 해야겠다 싶어졌다.


사실 고백하자면 장기여행을 나와 여행할 시간에 숙소에서 넷플릭스를 보는 사람들을 좋은 시선으로 본 적이 없다. 요즘 호스텔가보면 여행자들은 침대에 누워서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본다는 말에 한심하다 생각했다. 그럴거면 한국에 있지 뭐하러 나와? 나에게 닥칠 미래는 모른 채 그저 비난부터 하고 봤다.



우유니, 2020.02 (미스터선샤인에 빠져있을 때)




그런데 막상 빠져보니 외국에서 접하는 한국 콘텐츠는 맛이 달랐다. 한국에서 보는 드라마가 그냥 레토르트 곰탕이라면 외국에서 보는 드라마는 솥에서 24시간 우려낸 사골곰탕같달까. 숙소에서 한식을 해먹고 방콕하면 그렇게 편하고 좋았다. 밖에서 잘 못 알아듣는 현지 언어에 시달리다 눈을 감고 들어도 잘 들리는 모국어는 안도감을 준다.

여행은 매일이 새롭다. 신선한 자극도 강, 약, 중간 약의 강도로 느껴야 배가 되지 매일이 강, 강, 강이면 피곤하거나 무뎌진다. 그럴 때 한국 드라마를 보면 여행의 강도가 맞춰진다 해야할까. 너무 나의 죄책감을 합리화하는 것 같긴 하다.


이제는 외국 여행을 나와 한국 드라마를 봐도 한심한 기분은 덜하다. 외국에서 현지 음식을 안 먹고 한식당을 찾는 것과 같은 논리다. 맛있는 햄버거도 하루이틀이지 매일 먹으면 물리듯, 여행도 가끔 쉬어갈 때가 필요한 거다. 매일 된장찌개 먹는다고 비판할 수는 없는거다. 아재입맛도 지극히 개인의 취향이니까. 그래서 이제 드라마에 풍덩 빠지는 것이 나빠보이지 않는다. 그 시절 나의 향수를 달래주었던 드라마들 덕분에 여행의 추억도 진해졌으니.






백수 주제에 택시를 타다



한국에 돌아와 새로운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는 몇일 전, 함께 여행을 하며 친해진 부부를 만났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까지 마을 버스비는 천 삼백원. 버스비도 아깝고 운동도 할 겸 4키로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길눈이 없다못해 그냥 눈이 없을 정도로 길을 못 찾는 나였지만 결혼하기 전 22년을 살았던 내 동네였다. 지도를 보니 한 번 우회전하고 쭉 직진하면 됐다. 지도를 한 세 번은 더 본 후에 기세좋게 공유 자전거를 뽑아 올라탔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약속 장소 근처에 있는 공유자전거 거치대를 찍었어야 했는데 그냥 생각없이 을밀대(약속 장소)로 지도에 찍어버린 것이었다. 한 2키로쯤 달렸을 때 실수가 생각났다. 내가 그럼 그렇지, 왠일로 치밀하다 했어......

길 위에 멈춰서 보고있던 휴대폰 지도 어플에 자전거 거치대를 검색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나의 현 위치’따위를 알지 못하는 공유자전거 사이트에 들어가 일일이 주소를 쳐가며 근처 거치대를 찾아야했다. 하지만 아무리 22년을 살았던 동네지만 초행길이었고 왜 신도시에는 6단지, 7단지가 이렇게 많은 것인가. 이미 약속 시간은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망한 것 같다는 기운이 올라왔다.


학교옆에는 백퍼센트 거치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익숙한 지명인 7단지 옆에 있던 고등학교를 지도에 찍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분명히 있다고 했는데 길치눈에 보이지않는 거치대를 찾아 학교 두 바퀴를 빙빙 돌았다. 그런데 자전거가 없다... 온라인 개학했다고 없앤건가 뭔가.... 진짜로 망했다.

빠르게 포기하고 두 번째 대안인 지하철역으로 내달렸다. 지하철역에도 백퍼센트 거치대가 있기 때문에. 이미 을밀대에서 가까운가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지 오래였다.


약속시간이 10분 지나고 드디어 자전거 거치대를 찾았다. 자전거를 내려와 지도를 찾아보니 약속장소까진 1.2킬로미터나 떨어져있었다. 이미 늦어서 걷기엔 많이 늦은 상황에 눈물을 머금고 택시를 탔다. 1300원 버스비를 아낄 요량으로 자전거를 탔다가 결국 3900원 택시를 탔다. 돈 한푼 못 버는 백수가 백주대낮에 그것도 22년을 살았던 내 동네에서 길을 못찾아 택시를 탔다.

 

택시에 있던 3분동안 자괴감, 슬픔, 화남 등 오만가지 감정이 몰아쳤다. 그나마 역앞에서 하릴없이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 기사님을 조금이나마 도운 기분에 위로가 됐다. 그런데 누가 누굴 돕냐 건방진 백수같으니라고. 나는 을밀대 냉면을 먹을 자격도 없어......



그래도 맛은 있었다 을밀대...




백수가 되니 택시는 마치 직장인일 때 비싼 옷을 사며 사치했던 정도의 파급력이다. 백수에게 택시는 사치.

앞으로 택시탈만큼 술도 마시지 말고 막차끊기기 전까지 놀아야겠다.

을밀대도 사치다. 집에서 둥지냉면을 끓여 먹어야겠다.






과로사하는 백수



“하루종일 뭐하고 지내?” 만나는 (직장인) 친구들마다 백수의 하루일과를 물어온다.

백수의 하루는 쏜살같이 흐른다. 회사다닐 땐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욕하다가 퇴근하고 씻으면 하루가 끝이었다. 백수일 때는 아침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한 시간넘게 하고, 집안일 좀 하다 ‘이제 글 좀 써볼까’하면 점심 시간이다. 또 점심을 먹고 치우면 한 시간 이상이 훌쩍 지난다. 운동 좀 하고 ‘이제 생산적인 일 좀 해볼까’하면 어둑어둑해진다. 저녁을 먹고 치우면 잘 시간. 이런 식으로 늘 한 건 없는데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더 짜증나는 건 일한 것도 아니면서 밤이 되면 어김없이 피곤하다. 노는 것도 피곤하다.  


특히 삼시세끼 다섯 식구의 음식을 설거지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설거지만 줄여도 글 한 편은 쓸 것 같았다. 한국에 온지 일주일도 안됐을 때, 엄마를 꼬득여 엄마 돈으로 식기세척기를 샀다. 식기세척기는 혁명이지만 그렇게 아낀 시간에 뭘 했는가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쯤 되니 백수의 자괴감이 든다.  


여행을 하던 때와 크게 달라진 일상은 없다. 여행 중엔 집에서 밥을 먹는대신 외식을 많이 했고, 일을 하는 대신 여행을 했지만 큰 줄기는 같다. 아침에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먹고 싶은 만큼 천천히 밥을 먹는다. 그런데 한국에서 하는 백수생활에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야할 것 같은 강박이 있다.


외국에 있을 때는 하루종일 숙소에서 책을 읽거나 블로그를 하는 시간이 여행의 일부로 여겼다. 독서를 통해 여행지에서 받은 감명을 말랑말랑하게 한번 더 느끼고, 소중한 감정이 휘발되지 않게 기록하는 게 중요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한국에 오니 같은 행위를 비생산적인 활동으로 분류한다. 다른 이도 아닌 내가!

 

하릴없이 책에 파묻혀 있는 대신 글을 한 문장이라도 더 쓰고, 온라인 스토어에 제품을 하나라도 더 올려야할 것 같다. 유튜브는 웃긴 동영상만 보는게 아니라 생산적인 내용의 영상만 봐야할 것 같다. 드라마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부부의 세계>를 보고 있으면 드라마를 넋놓고 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매일 쓰던 블로그는 우선순위가 가장 아래로 떨어졌다. 그 시간에 앞으로 뭐 해먹고 살지 찾아야한다며 블로그를 등한시한다. 한가하게 블로그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마음속의 외침에 여행 기록은 아직 일 년 전에 멈춰있다.


그 누구도, 심지어 함께 살고있는 부모님조차 열심히 살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나를 몰아치고 있다. 회사에 가기 싫다면 어서 다른 일을 찾아 안정적인 궤도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어서 글도 양껏 써서 원고를 마무리하고 투고해야하는데, 온라인 스토어도 개설해서 물건을 판매해야 하는데, 요가를 가르치려면 시퀀스도 짜야하는데, 등등. 재미있어 보이고 하고 싶은 일은 참 많은데 우선순위가 지켜지지 않고 이리저리 표류하며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것 같다. 백수가 과로사한다지만 성과가 있는 과로였으면 좋겠다. 결국은 성과에 대한 압박이 여행 후에 어김없이 찾아온걸까.






당장 생업을 위해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자 마음먹었다. 애초에 계획했을 때 바로 성과가 나올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스토어에 주문이 안 들어오면 초조하고, 다른 잘 되는 가게를 보면 '왜 저 집은 저렇게 잘 팔까' 자괴감이 든다. 요가도 가르쳐야하는데 속절없이 살이찐 몸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한국에 오면 매일 글을 쓸 줄 알았건만 안 쓰는 날이 더 많다.


택시비같은 비용을 아끼고 외식비용을 아끼면 당분간은 돈을 벌지 않아도 괜찮을거다. 하지만 디양한 일을 궤도에 올려 월급만큼 벌 수 있는, 아니 연봉보다 많이 버는 프리랜서의 삶을 어서 살고싶다. 그래야 얹혀살고있는 친정에서 분가해 크고 흰 강아지도 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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