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길

Nothing lasts forever

by 망샘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치아 교정을 시작했다. 쥐처럼 앞니가 튀어나오던 사촌 오빠를 놀리던 벌을 받았는지 나 역시 3년 후 앞니가 돌출되기 시작했다. 조카의 선례를 본 엄마는 식겁하시고 4년간 치과에 돈을 부어주셨다. 덕분에 나는 2020년인 오늘까지도 세기 초 교정기를 장착하고 있다. 윗니 철길은 떼어낸 지 오래지만 아랫니 안쪽에 설치한 와이어는 아직도 함께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한 교정기는 이젠 한 몸 같다. 20년의 교정 외길을 같은 치과 의사 선생님과 걸어왔다.

매년 한 번씩 검진을 받으러 간다. 그때마다 늘 계시는 치과 선생님은 내가 초등학생에서 기혼 여성이 된 만큼 나이를 함께 먹었다. 여전히 명료하고 똑 부러지는 선생님은 신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주치의다. 세계여행을 하며 치과 검진을 못가 오랜만에 치과를 찾았다. 여느 때처럼 아랫니에 붙어있는 철사를 교체해주고, 교정기를 세척해주는 똑같은 루틴이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은 선생님이 끝나고 잠깐 진료실에서 얘기 좀 하자고 하셨다. 불안했다. 나는 돈이 없는데, 재교정해야 하는 건가? (이미 한 차례 재교정을 마친 상태다. 그것도 10년이 지나 재교정을 하게 됐는데 그걸 공짜로 해주셨다!) 이번에 또 재교정을 하게 되면 공짜로 안 해주실 텐데 어떡하지...
짧은 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애써 불안함을 떨쳐내며 수많은 상장과 학회 기록으로 빼곡한 방에 앉아 다른 진료를 보고 들어오시는 선생님을 기다렸다. 이윽고 짬을 낸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독방으로 부르신 걸까.

“내가 따로 보자고 한 이유는 인사를 하려고” 선생님이 시원하게 말문을 여셨다.
“네? 무슨 인사요?” 예상치 못한 말문에 당황했다.
“내가 병원을 내놨어. 가을부터 다른 선생님이 이제 오실 거야. 인수인계는 해놓을 테니 지금처럼 검진받으러 오면 돼. 여하튼 나는 노안이 너무 심해져서 작년부터 병원을 다른 사람한테 넘기려 했어. 봄에 인계받기로 한 사람이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무산됐어. 아무한테나 넘길 수는 없으니까 찾다가 이제 가을엔 진짜 넘기기로 했어.”

생각하지 못한 대화였다. 언제고 똑똑하고 명료한 선생님은 지금처럼 늘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는데 노안이라니, 은퇴를 하신다니...

“선생님 아직 오십 대밖에 안되지 않으셨어요? 아직 젊으신데...”
“사실 진료를 볼 수는 있지만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환자를 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결정했어. 아쉽지만 이제 그만 하려고 해. 그동안 고생했다. 잘 지내고~”
이렇게 선생님과의 20년 교정 인생의 마지막을 맞았다.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나의 똑똑한 선생님은 벌써 은퇴를 하셨다.

영원한 건 없다는 진부한 말이 문득 다가왔다. 세계여행을 하며 만난 친한 친구가 헤어진 지 반년 후 세상을 떠났을 때도 느꼈던 진리다. 그의 죽음 이후 또 잊고 있던 인생의 유한성이 훅 들어왔다.

인생은 정말로 짧다.

언제 맞이할지 모르는 내리막길, 지금 오르고 있는 오르막길(평지는 아니겠지?)을 더 가열차게 올라 최대한 늦게 내려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