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의 존재 의미는 오토마타 기제로 실행하는 자아복제다. DNA 정보의 엔트로피가 상대적으로 높은 고등 생물들의 생존은 그만큼 쟈크 모노(Jacques Monod)의 <우연>의 확률이 높아지며, 적응의 선택과정으로 다양성을 지니게 된다.
하나의 바이러스에게 인간 자아의 원초적 유형인 존재적 정체성이 있다면, 복제된 바이러스의 정체성은 오리지널로부터 얼마큼의 다양성을 지닐 것인가? 자연과학적 논리로부터의 다양성이 아니라, 인문적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으로 접근하는 다양성을 생각해보자.
첫 번째 의문은 안정된 반복을 통해 일관성이 확보되며 형성되는 생존 방식의 고유성 (intrinsic property)이다. 이 고유성은 복사의 행위 자체보다 복사체 군집들이 공유하는 객관적 가치들이다. 모노가 작은 분자 들로부터의 우연성을 사회적 진보까지 연결했다면, 역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복제 바이러스의 군집이 공유하는 객관적 가치들을 생존을 위한 진보의 결과로 추론해 보자.
바이러스들은 모노의 <우연>을 겪으며, 신종 변이들로 끝없이 진화한다. 여기서 우연의 확률은 DNA의 엔트로피 효과에 의한 <변이>보다는 객체수로 채워지는 샘플공간 규모의 통계로 보아야 한다. 과학자들의 바이러스 객체 크기 조사에 의하면, 감염자 체액의 단위 부피 밀리리터 당,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십억 개의 바이러스 객체 수를 추정한다고 한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어느 종의 샘플보다 규모가 수십억 배 큰 것이다. 바이러스는 DNA의 엔트로피 한계를 너머, 고등생물들보다 월등히 많은 <우연>들을 발생시킬 수 있는 규모의 통계적 객체 수를 지닌 것이다. 일억의 샘플에서 0.000001%의 확률에 맞는 객체수가 한 개라면, 천억의 샘플에서 같은 확률에 맞는 객체 수는 천 개가 된다. 그중, 항체나 백신에 저항력을 지닌 변이들은 생존을 유지하며 기하급수적 복제의 속성을 유지한다. 우연히 선택된 객체의 복제 속성은 바이러스 군집 자체의 생존과 <적응>으로 관찰된다.
객체의 초미세적 DNA 단계에서 발생하는 <우연>의 변이에는 바이러스의 능동적 생존 의지나 군집적 지능이 없다. 그러나 수천억의 군집으로 관찰될 때, 생존 의지의 문명적 발현으로 관찰될 수 있다. 같은 종의 군집 속에서 변이들은 결과적으로 극소수의 진보적 그룹이 된다. 자연은 그들 중, 생존과 번식의 시대적 조건부 합목적성을 지닌 변이 객체들을 걸러 내어 주는 필터의 기능을 한다. 결과적으로 신종 변이의 바이러스는 문명적 생존 지능을 지닌 존재로 관찰된다.
사람의 사회에서 소수의 진보 성향 그룹들을 이 관찰의 아날로지로 대입해 보자. 바이러스와 달리 사람은 개개인의 의식으로 소속된 문명과 내적 순환 (recursive) 관계를 지니고 있다. 개인의 사고적 유동성과 <종족 본능>(tribal instinct)은 소속된 문명의 시대적 피드백과 물려서 헤겔적 과정을 겪으며 헤치고 모이기를 반복한다. 프랑스혁명 전, 루소의 사회 계약, 몽테스크의 권력 분립, 볼테르의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이웃나라 영국에서 루소와 볼테르에게 영향을 준 로크의 계몽적 경험 철학 등을 문명적 <변이>들로 가정해 보자. 소수의 당시 진보 주의자들에게 바이러스 변이의 <우연>과 결과적으로 문명적 진보의 군집적 관찰을 추론해 보자.
바이러스의 생존과 적응은 우연의 결과들이 자연의 선택을 걸치며 군집의 의지로 발현되었다. 인간의 경우는 문명적 필연의 모멘텀들이 시대의 현실과 충돌하며 해체와 결합을 반복한다. 이 반복은 자연적 과정의 일부로써 <필연>이지만, 그 과정으로부터의 결과물(resolution)들엔 <우연>들의 개입을 생각하게 한다. 망치로 용도가 없어진 가구를 해체하여 부수는 것은 필연성이 개입하지만, 부서지고 분해된 가구의 부분들은 다음 용도를 위한 가구의 변이와 관련해 많은 우연성들을 내포한다.
생존의 고유성이 바이러스는 군집의 형태로 발현되는 반면, 인간의 것은 정확히 군집적 문명의 형태에만 단정할 순 없다. DNA가 지닌 본질적 비 완벽성이 오차의 근원이라면, 바이러스는 복제 과정에서 모노의 <우연>의 변이 모델로부터 군집적 필연의 형성을 이룬다면, 사람은 의식의 비결정성이 <우연>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문명적 필연은 헤겔의 모델이지만, 변증적 단계별 점프는 의식으로부터의 <우연>을 수용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생존적 고유성이 내포한 진보의 필연성이다. 첫 번째 의문에서의 고유성이 정체되면서, 동시에 백신과 숙주의 면역체계 적응에 의해 멸종의 위기에 몰리는 바이러스는 변이를 통해 고유성을 진보시킨다. 이 변이는 객체의 레벨에선 철저히 우연으로 관찰되지만, 인간의 국가론처럼 확대하면 필연적 균형의 섭리로 인간의 문명적 진보와 아날로지이다.
모든 생명들과 바이러스들의 존재적 정체성이 <생존>인 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해, 파괴, 소멸 등을 시도하려는 내재적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기타 생명들의 정체성으로부터의 이탈된 진화의 형태로 의식의 비결정성이 유도한 <우연>과 관계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을 위해 자신을 소멸시킬 수도 있게 변이 된 존재다.
사르트르의 실존은 객체의 존재적 정체성과 군집적(사회적) 기대들을 초월하는 것인데, 이 초월의 오버드라이브는 근원적 자유와 존재의 맞바꿈이 될 수도 있는 자체 소멸의 리스크를 안고 있다. 데리다가 언급한 정체성의 파편화도 오버 드라이브의 리스크를 던질 수 있다. 또한 생존(삶)의 객관적 의미나 가치를 거부하는 허무주의도 마찬가지다. 인간만의 필연적 진화의 방식이다.
스스로 자신을 소멸시킬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컴퓨터 알고리즘을 생각해보다가, 흥미로운 관찰을 하게 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지우기 위해선, 자신의 실제를 지워줄 복제된 이미지(허상)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존재로 보거나 존재의 가치로 본다면, 그 존재나 가치를 소멸시키기 위해선 그 존재나 가치의 복제로 소멸을 실행해야 한다.
이 관찰의 인문적 아날로지는 무엇일까? 사르트르의 초월과 데리다의 해체를 획득하기 전의 전제 조건이 무엇일까? 초월의 대상, 해체의 대상 스스로가 실행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내게 실존을 주는 주체는 사르트르가 아니고, 내가 속한 정체된 구조들의 기표와 언어적 구성물들을 해체할 수 있는 주체도 데리다가 아니다. 말하고 보니, 지젝을 읽으며 떠 다니던 말들이 떠오른다. 지젝은 주체적 의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내가 이해한 지젝의 생각을 빌린다면, 군집적 필연인 이데올로기, 규범, 통념 등이 주체적 자유를 제어한다고 본다. 이것은 필연성이 우연성을 억누르는 것이거나, 우연성들이 너무 강해진 필연성 들로부터 그 속성을 잃어가는 것이다. 주체적 의지로부터 독립적인 바이러스들의 우연성은 지젝의 객체적 책임론으로부터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