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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Jan 13. 2024

빨랫줄

따뜻한 봄볕에 널린 신앙촌 밍크 이불 사이에 얼굴을 넣어 비벼 대는 게 좋았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들을 따라 이불 터널들이 생겼다. 터널 속을 뛰어다니며 기차놀이를 했다. 방구석의 빨간 나일론 이불에 핀 촌스러운 목련꽃도 봄볕의 빨랫줄에 걸리면 생화처럼 다시 폈다. 무거운 이불들이 빨랫줄을 늘어트리면 할머니 허리처럼 휘어진 장대들이 여기저기서 버텨줬다. 터널을 지나고 옥수수밭과 오막살이를 지나는 기차는 나른한 장대역에서 쉬었다 갔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빨랫줄의 하얀 춤꾼들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어디에 숨었는지 알기도 전에 다시 해가 나고, 춤꾼들은 다시 줄을 서있었다. 땡볕 아래 까치발로 춤꾼들의 발을 잡아당기면 얼굴에 떨어졌다. 달큼한 무궁화 비누 냄새가 좋았다.


시원해진 바람과 시퍼런 하늘 및에 널린 빨래들이 푸르스름해졌다. 이젠 장대들도 춤을 춘다. 장대위에 앉은 제비가 놀라서 날아간다. 장독대 쪽에 높게 걸린 빈 빨랫줄엔 겁이 많은 참새들이 노을을 보며 수다를 떨었다.


내복들이 마른 명태처럼 딱딱하게 널려있었다. 앙상한 팔뚝에 딱딱한 주름들 밑엔 고드름들이 달려 있었다. 달큼한 무궁화 사탕처럼 고드름을 오도독오도독 깨물어 먹었다.


서울로 전학을 간 사이에 마당에는 금성 백조 세탁기와 한일 짤순이가 들어와 있었다. 빨랫줄은 짧아졌고 장대들도 많이 떠났다. 이후 기차놀이를 하지 않았다. 춤을 추던 춤꾼들도 빠르게 잊어버렸다. 그냥 시시했던 놀이들이었다. 이제 다시 시시한 것들이 그립다. 시시해서 소중해지는 것들이 있다. 반백년 세월에게 이유를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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