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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진 May 07. 2022

내 친구 모리스






사립학교 오너의 집은 쓰임이 많다. 에어비앤비 하우스로 렌트도 하고 집안에 있는 ㄱ자형의 멋진 수영장은 외부 업체의 수영 선생님들이 방문하여 아이들의 방과 후 수영 수업이 진행되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수업을 하는 것도 좋았고 부모의 참관이 무척 자유로웠기에 나는 매 수업 때마다 수영장 밖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의 수영 수업을 구경했다. 나와는 다른 유년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을 구경하는 재미, 이곳의 수영 수업 방식을 구경하는 재미는 아주 쏠쏠했다. 무엇보다 하얀 2층 집에 파란 하늘과 수영장 그리고 푸릇푸릇한 나무들만 시야 안에 가득한 눈이 부시는 이  풍경 아래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 첨벙 대는 소리 그리고 선생님의 소리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기는커녕 한국에 가서도 잊지 않고 싶어서 자꾸 눈에,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작은 키에 레게 머리를 하고 늘 기타를 들고 다니는 모리스와 그의 일본인 와이프 그리고 딸 마리는 이 집의 2층을 렌트하여 살고 있었다. 2층 테라스에서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모리스와 딸 마리와 가끔 눈인사를 하곤 했다. 자주 가던 한국 레스토랑에서도 모리스와 마리를 가끔 마주 졌다. 아이들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밥도 먹다 말고 레스토랑 테라스에 옹기종기 모여 잘도 놀았다. 그러던 아이들 셋이 무슨 작당이라도 꾸몄는지 모리스에게 가서 귓속말을 속닥속닥 하더니 모리스가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걸어온다. 나한테 오는 게 맞나 싶은 마음에 당황한 나는 침이 꼴깍 넘어간다. 마리가 우리 아이들을 집에 초대해서 놀고 싶은데 마침 윤아의 반 친구 일본인 마나까도 오기로 되어 있으니 함께 하자고 한다. 마리의 엄마가 일본인이라 일본인 가족인 마나까네와 가끔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아!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플레이 데이트 구나! 우리가 플레이 데이트에 초대받은 거구나! 싶어 기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모리스의 가족이 오너의 2층 집에 살 때에도, 근처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바비큐 파티를 할 때에도 아이들은 첨벙첨벙 깔깔깔 집 안의 수영장에서 놀았다. 수영장 주변의 뜨거운 시멘트 바닥을 뛰어다니다가 "아 뜨거워" 하면서 급하게 코만 움켜쥐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고 난간에 매달려 얼굴을 내밀며 간식 한 입 얻어먹고 뭐가 그리 웃기는지 마주 보고 웃으며 물속으로 꼬르륵 들어가 버리곤 했다. 이 뜨거운 햇살 아래 이토록 자유로운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한국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남편 생각이 절로 났다.


"여보, 고마워. 그런데... 나 집에 가기 싫다..."

아들의 방과 후 수영 수업

UN에서 섬나라의 기후 변화에 관련된 일을 하는 모리스의 와이프는 늘 출장이 많아 마리는 항상 아빠 모리스와 함께 였다. 어느 주말에 모리스는 윤아만 데리고 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다모다 시티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를 쉬라고 배려해준 무척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순간 한국 뉴스에서 본 여러 아동 관련 범죄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나쁜 생각은 떨쳐버리려 애를 쓰고 그는 나의 친구라는 생각으로 급하게 돌아왔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윤아는 엄마 표정이 걱정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아이와 마음이 통해서인지, 내가 표정을 숨기지 못해서였는지 나는 너무 재미있었다고 과자를 씹으며 조잘조잘 영화 내용을 이야기하는 아이를 보니 걱정했던 마음이 외려 미안해졌다.  피지에 올 때마다 한 순간 한 순간 집에서 응석만 부리던 것과는 다르게 아이가 커가는 것을 깊이 느낄 때가 있는데 우리가 셋이서 똘똘 뭉쳐 잘해나가야 하는 타지에 있어서 일까 싶다.


음악을 사랑하는 모리스는 금요일 약속이 있는 날이 종종 있는데 혼자인 마리를 시터에게 맡기곤 했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마리를 초대해 슬립오버를 하기로 했다. 너무 신이 난 아이들은 마리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마리의 집으로 가서 짐을 싸는 순간부터 함께 했다. 마리 엄마가 출장을 가지 않는 주말이면 다 같이 리조트에 가서 놀다 오기도 했는데 에메랄드 빛 바다와 유난히 깊은 하늘을 바라보며 모리스는 기타를 들고 기분 좋은 라이브 음악을 들려주었다. 마리네와 함께 하는 주말 덕분에 우리의 주말은 더욱 풍성해졌고 나는 현지인처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낯선 문화에 잘 적응하고 있는 아이들과 내가 대견했고 피지라는 나라를 선택한 나 스스로를 칭찬하며 뿌듯해 했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간혹 커피 한잔을 하는 사람은 모두 엄마들이었지만 피지에서 나는 그런 자유 시간에 모리스와 커피를 마셨다. 모리스는 간판 하나 없는 건물들 사이 가정집으로 보이는 커피숍을 알고 있었다. 흔한 브런치 카페 하나 없는 피지라 신입 외국인은 알기 힘든 곳들을 모리스는  알고 있는 듯했다. 어느 날은  역시  번을 왔다 갔다 했던 USP 대학교에서 만났다. 커피숍 바로 앞에 있는 서점도 가봤는데  건너편에 커피숍이 있는지는 몰랐었다. 이곳은 마치 호주 보타닉 가든의 미니 버전 같았다. 커피숍은 아담하지만 거칠고 무성한 여름 나라의   식물들이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나를 반겨주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야외에 자리를 잡으려고 보니 테이블과 의자는  테이블에 돌의자였다. ! 초등학교 운동장 한편 그늘에 이런 돌의자에 앉아서 시원해하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혼자만 아는 웃음을 삼키며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돌의자에 앉으니 세지도 약하지도 앉은 바람이 불어온다. 피지에 와서 뉘앙스로 배운 "BREZZE"라는 단어를 그대로 느끼고 있는 듯했다. 모리스는 주변 섬나라 이야기며 와이프와의 연애 이야기,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피지언들과 곱슬 정도가 어떻게 달라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이야기를 내가 알아들을 법한 쉬운 단어들로 쏟아낸다.  와이프의 나라인 일본을 갔을  대도시의 빠른 속도에 적응하기 힘들었다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이때다 싶어 나도 준비해  노란색 박스 하나 건넨다. 맥심 믹스 스틱!



모리스, 담배엔 믹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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