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한파가 몰고온 동장군의 강력한 위세에 발을 동동거리며 추위를 피하기 급급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슬슬 따스한 기운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정말 무엇을 하든, "어쨌든 시간은 흘러간다."는 말이 진리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봄은 복받은 계절이다. 호불호가 확실히 나누어지는 여름이나 겨울과 달리 봄과 가을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편인데 이중 특히 봄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 듯 싶다. 겨울 내내 시달렸던 추위를 몰아내고 따뜻한 기운을 불러온 계절을 딱히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두껍고 무거운 겨울 옷에서 해방시켜 준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봄은 세상 곳곳을 온갖 화사한 빛으로 물들이며 눈호강까지 시켜준다. 개인적으로 봄이라는 계절이 품고 있는 그 싱그러움은 아직은 한 해의 초반이라 할 수 있는 그즈음부터 12월까지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해주는 것만 같다. 앞으로의 1년동안 나의 앞날에 찬란한 꽃길이 깔려있을 것만 같은 착각(?) 혹은 긍정적 에너지를 갖게 하는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봄은 영원한 나의 아군이다.
이처럼 반짝이는 삶의 찰나에 와인이 빠질 수 없지 않은가. 사실 와인을 마셔야만 하는 당위성은 1년 내내 차고 넘치지만 봄에 마셔야 더욱 마실 맛이 나는, 향긋한 레이블을 가진 와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장 먼저 소개할 와인은 이름부터 봄과 딱 잘 어울린다. 호주 빅토리아 주에서 생산된
‘트레드 소프틀리(Tread Softly)’가 그 주인공인데 이 와인은 여러모로 참 사랑스럽다. 병목과 후면 레이블을 가득 채운 화사한 꽃그림은 ‘살금살금 걷다’라는 브랜드의 의미처럼 사뿐 사뿐 다가오는 봄의 여신을 연상시킨다.
발걸음만 가벼운 것이 아니다. 이 브랜드는 각각의 포도 품종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으로 만나 볼 수 있는데, 이 와인들은 공통적으로 알코올 도수가 10-12.5% 정도로 같은 품종으로 만들어진 다른 와인들에 비해 여리여리하다. 또한 생산자는 와인 12병이 판매될 때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캠페인을 꾸준히 진행하여 지구 환경 오염을 조금이나마 순화시키고 있다고 하니 자연에 대한 마음의 짐도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듯 싶다(이 글을 쓰며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니 벌써 65만 그루를 심은 것으로 나와 있다.).
트레드 소프틀리는 '포스 웨이브 와인즈(Fourth wave wines)' 라는 호주의 유명한 와인 회사에서 판매하고 있는데 이 회사도 '제 4의 물결'이라는 이름처럼 새로운 생산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독창적인 스타일의 와인을 자유롭고 발빠르게 만들기 위해서 자체적인 포도밭이나 와이너리를 소유하지 않고 독립 와인메이커들과 협업하여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산자의 이런 철학 때문인지 트레드 소프틀리는 신선하고 상큼하다. 그르나슈라는 레드 포도 품종은 14%는 가뿐하게 넘기는 알코올 도수를 가진 와인으로 생산 가능한데, 이 브랜드의 그르나슈 레드 와인은 알코올 도수가 간신히 10%를 넘긴 10.8%이다. 게다가 딸기, 라즈베리, 검붉은 과일의 향긋한 내음과 부담스럽지 않은 바디감으로 편한게 즐기기 좋다.
청포도 품종인 글레라로 만든, 상큼한 배 향이 매력적인 '트레드 소프틀리 프로세코(스파클링 와인)'와 여러 레드 품종을 블렌딩하여 만든 로제 와인 역시 알코올 도수가 9.9%에 불과하여 가벼운 취기와 함께 살랑이는 봄날을 만끽하기에 알맞다.
두 번째로 소개할 봄꽃 느낌의 와인은 스페인 리오하의 유명 와이너리인 '엘 꼬또 데 리오하'의 '엘 꼬또 세미돌체'이다. '엘 꼬또 데 리오하'는 와이너리가 세워지고 50여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와인 품질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리오하는 물론 스페인 전역에서 손꼽히는 생산자로 인정받고 있다. 따로 광고나 홍보를 하지 않아도 엘 꼬또의 와인이 스페인 내수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고 하니 그 유명세가 어느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화사한 꽃과 나비 그림의 레이블이 인상적인 이 와인은 리오하에서 가장 높은 고도에 있는 포도밭에서 수확한 샤르도네로 만든 것으로, 저온발효하여 품종 특유의 사과, 시트러스의 향과 적당한 산도를 잘 갖추고 있다. 또한 '세미돌체(semi-dulce)'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semi-sweet' 정도의 당도를 보이고 있어 봄의 달콤함을 즐기고 싶은 경우에 마시기 좋다. 향긋한 꽃내음을 찾아온 나비와 들꽃, 그리고 연한 레몬빛의 이 와인은 빛나는 햇살과 따뜻한 봄바람을 품고 있는 듯 하다.
다만 살랑거리는 와인의 느낌과는 달리 알코올 도수는 10-12%정도 되어서 마냥 가볍지만은 않으니 디저트, 치즈 등과 함께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기를 권한다. 개인적으로는 갓 구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진 깜빠뉴 위에 브리 치즈와 썬드라이드 토마토 한 조각을 올린 후 이 와인을 곁들이면 참 맛있을 듯 싶은데, 입맛은 100% 개인 취향이며, 사람마다 백이면 백 모두 다르므로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가볍고 담백한 음식을 추천한다)을 곁들인다면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와인을 맛있게 마실 수 있는 한 가지 팁을 더 소개하면, (모든 화이트 와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인데)레드 와인보다 차갑게 해서 마셔야 본연의 산도와 아로마, 풍미를 잘 느낄 수 있다. 화이트 와인은 그 종류에 따라 7-12도 사이로 차갑게 해서 마시면 좋은데 이 와인의 경우 아이스 버킷 등을 활용하여 8-10도로 즐기기를 추천한다.
이번에 만나볼 와인은 꽃다발을 대신할 수 있을만큼 그 존재만으로 곱고 향긋하고, 아름답다. '까바(Cava)'는 '스페인의 스파클링 와인'으로 주로 스페인 토착 품종 포도인 자렐로, 마케베오, 파레야다로 만들어지며 피노누아 같은 국제 품종을 활용해 블렌딩하기도 한다. 스파클링 와인을 만드는 몇 가지 양조법이 있는데 그 중 까바는 샴페인처럼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특유의 효모향과 부드러운 기포를 지니고 있으며 가격은 샴페인보다 부담이 없기 때문에 스파클링 매니아들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까바의 최대 생산지는 스페인 북동부에 위치한 카탈루냐 지방의 페네데스인데, 이 곳에서 전체 까바의 95%이상을 생산하고 있다니 하니 까바의 대표주자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호메 세라'는 페네데스에서 매우 유명한 생산자로, 1943년 설립된 이 와이너리는 넓은 부지의 포도밭과 현대적인 설비를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최고 품질의 까바를 생산하고 있다. 우리에게 봄꽃을 만끽하게 해 줄 까바 역시 바로 이 호메 세라의 작품으로 '호메 세라 부케 카바 로제'와 '호메 세라 카바 브륏'이다.
'호메 세라 부케 카바 로제'는 봄의 신부를 위한 부케처럼 우아하고 아름답다. 마치 핑크빛 튤립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은 와인병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봄의 설레임을 전해준다. 샴페인의 주품종이기도 한 피노 누아와 스페인의 토착 레드 품종인 트레파트가 블렌딩된 이 와인은 체리, 자몽, 딸기, 라즈베리의 상큼한 향과 적절한 당도를 선사해 식전주로 사랑을 받고 있다.
화사함으로 본다면 '호메 세라 부케 까바 브륏'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 꽃의 여왕인 장미 꽃다발을 두르고 있는 이 와인은 스페인 토착 품종 포도인 파레야다, 자렐로, 마케베오를 베이스로, 시트러스한 향과 꽃내음, 까바 특유의 토스트향을 품고 있으며 '브륏'이라는 당도에서 알 수 있듯이 드라이하여 질리지 않고 오래오래 부드러운 기포를 즐기기에 적합하다.
이 와인병을 둘러싼 꽃다발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인데, 그 덕분에 와인을 따를 때는 마치 상대방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것처럼 보이는 즐거운 트릭까지 선사한다. 4-5월에 만발하는 이 꽃들의 꽃말을 찾아보았다. 분홍 튤립의 꽃말은 '사랑, 애정, 배려'이고 빨간 장미의 꽃말은 '사랑'이었는데 이 꽃같은 와인들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함께 즐기기에 봄처럼 또 좋은 시기가 있겠는가.
꽃내음을 품은 와인들을 즐기기에 봄날은 아쉽게도 짧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들꽃같은 와인들이 남아있다. 그 이야기는 햇살이 더욱 따스해진 어느 봄날,테이블에 올릴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