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의 레베카(1940)와 뮤지컬 레베카, 넷플릭스 레베카(2020)
서스펜스의 거장 알프레도 히치콕부터, 국내 뮤지컬 시장을 매료시킨 '레베카'의 매력이 넷플릭스도 사로잡았다. 넷플릭스 영화 '레베카(2020)'는 원작에 없는 설정과 인물의 내면 심리를 덧대 가장 현대적인 '레베카'를 만들어냈다.
알 사람은 다 안다는 '레베카'에는 타이틀 롤인 레베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 후, 주변에서 그를 흠모하고, 돌보고, 증오했던 이들이 그의 환영을 작품 곳곳에 심어놓았다. 막심 드 윈터라는 남자 주인공보다 더 빛나는 레베카와 나, 댄버스 부인의 활약이 이야기의 주축을 이룬다. 죽은 레베카를 둘러싼 미스터리와 두 여자의 심리전, 자연스레 강조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는 매력에, 마치 죽은 레베카에게 끌리는 것처럼 '레베카'를 잊을 수 없게 된다.
◆ 쿤체·르베이 콤비의 음악으로 피어난 히치콕의 '레베카'
영국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한 히치콕의 '레베카(1940)'는 서스펜스 스릴러의 거장이 된 그의 대표작으로, 현재까지 사랑받는 초기작이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 특유의 색깔과 문화는 물론, 히치콕의 독특한 연출 방식이 고스란히 담긴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지금 보기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배우들의 연기나 시대상을 담은 설정들이, 오히려 '레베카' 속 캐릭터로서는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특히 캐스팅 당시 신인이었던 나 역의 조앤 폰테인의 풋풋함이 그렇다.
이 작품에선 절로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데다, 심약해 보이는 나의 외모와 분위기가 영화의 톤을 결정짓는다. 댄버스 역의 주디스 앤더스는 전형적인 외골수이자 딱딱한 사감선생 같은 분위기로 맨덜리를 장악한다. 마치 기계나 도자기 인형처럼 감정이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서서히 옥죄어 오는 장면은 묘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신에 따라 조금씩 바뀌긴 하지만, 가끔은 불협화음을 내는 듯한 배경 음악도 독특한 요소다. 마치 흑백 무성영화의 효과를 일부러 낸 듯, 클래식한 느낌을 선사한다. 시청각적으로는 기대 이상으로, 1940년대 할리우드 무비의 묘미를 가득 만날 수 있다.
히치콕의 영화의 전반적인 설정들이 뮤지컬 '레베카'에도 적용됐다. 여기에 한층 카리스마 넘치고 첫인상부터 두렵기 그지없는 댄버스 부인 캐릭터가 한층 극적으로 표현됐다. 유럽 뮤지컬의 거장 미하일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 콤비는 각자 각색·집필, 곡 작업을 맡았고 이 뮤지컬은 한국에서 크게 성공했다. 지난 3월까지 공연된 '레베카'는 벌써 오연째를 맞았고 옥주현, 신영숙, 엄기준, 신성록 등 유명 배우들이 두루 거쳐간 흥행작이 됐다.
뮤지컬 '레베카'에선 드라마적으로 가장 강력한 서스펜스와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주인공들이 직접 감정을 표현한 넘버를 부르다 보니, 더욱 극적으로 느껴진다. 강렬한 감정도, 아기자기한 설정들도 극대화된다. 세 작품 중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동화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는 모두가 아는 동명의 넘버를 부르는 댄버스 부인은, 죽고 없는 레베카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무대 위에 불러낸다. 실체가 없어도 레베카의 환영은 극장에 넘실대고, 나의 심리를 따라가는 관객들은 끝없는 미스터리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 입체적 캐릭터성·설정 추가된 2020버전…현대적 연출의 묘미
전작들이 모두 유명 작품이다 보니, 넷플릭스 '레베카'는 비교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물론, 어떻게 다르게 표현했는지 눈여겨보는 편이 실제로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훨씬 재밌다. 먼저 한층 현대적으로 표현된 의상과 배경 설정들이 눈에 띈다. 여주인공인 나(릴리 제임스)는 기존의 나와 달리 넓은 통의 바지 패션을 자주 선보인다. 가진 것이 없어 위축은 되지만, 기본적으로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느낌은 그리 들지 않는다. 영화 후반에서 이런 매력은 더욱 배가된다.
원작에 없던 설정도 조금씩 추가됐다. 바로 막심이 몽유병을 앓고 있다거나, 나가 직접 저택 안을 돌아다니는 붉은 드레스 차림의 레베카의 환영을 따라가는 신 등이다. 덕분에 레베카를 향한 나의 감정은 단순히 신경 쇠약증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 뭔가 실체가 있을 거라는 믿음, 나 스스로도 레베카를 몰아내고 끊어내고 싶어 하면서도 별 수 없이 끌리는 심리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설정은 히치콕의 영화나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던 내용이다.
주요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나 처하는 상황들은 훨씬 더 직설적이고 구체적이다. 막심은 잭 파벨을 집으로 들인 나를 의심하는 말을 하는가 하면, 레베카의 흔적과 마주할 때마다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낸다. 이전 영화나 뮤지컬에서 그가 다만 말을 아끼던 모습과는 대비된다. 비밀스러운 남자이기보다, 뭔가에 두려워하고 있는 듯 인간적 해석이 돋보인다.
댄버스 부인 역의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도 그저 차갑고 딱딱하기보다 속내를 털어놓으며 약한 내면을 드러내는가 하면, 이를 역이용하는 능숙한 인물이다. 거울로 겹겹이 둘러싸인 서편 레베카의 방에 드나드는 신은, 나의 불안한 심리와 다중적인 댄버스 부인의 캐릭터가 동시에 드러나는 장치다. 전작에서 댄버스 부인들이 묘하게 경직되고 외골수적인 면이 부각됐다면, 크리스틴의 댄버스는 다르다. 오히려 웃음으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원하는 대로 상황을 설계하는 악역이다.
앞서 언급했듯 나의 성향도 전작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막심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되고, 모든 걸 걸고 지킬 것이 생겨난 순간 내·외적인 변화를 가장 극심하게 겪는다. 재판장에서 기절을 해서 지연시키는 전략만을 쓰는 기존의 나와는 다르다. 직접 차를 몰고 유치장에 수감된 막심을 구하기 위해 의사의 진료 기록까지 빼낸다. 현대적인 의상과 연출을 입은 만큼, 2020 버전에선 더 주체성이 강화된 여성으로서 기능한다.
맨덜리의 절벽에서 댄버스와 마주한 나는 그의 죽음을 만류한다. 주인공인 나와 '레베카'가 갖고 있는 사랑의 힘을 여지없이 확인하는 순간이다. 세기의 미인이었던 레베카와 미스터리가 이 작품을 끌고 가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결국은 모든 걸 극복하게 하는 사랑만이 영화와 뮤지컬, 세계적인 콘텐츠 플랫폼 넷플릭스까지도 굴복하게 한 힘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