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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Apr 03. 2022

어머니,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Part.0

유연한 사고, 남 탓하지 않기

2018년 하반기를 강타한 SKY캐슬. 압도적이던 1,2화는 잊히지 않는다.


김주영 쌤 데려오라고!! - <SKY 캐슬> 강예서 曰


"Tiger mum"이라고 혹시 들어본 적 있는가? 90년대 말 세계화의 물결과 함께 미국을 강타한 이 신조어는 한국어로 치면 “치맛바람이 거센 어머니”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미국에는 새로운 유형의 어머니라 신기했을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일상적이다. 아니, 이젠 치맛바람뿐만 아니라 바짓바람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예로부터 선비의 나라 후손들인지라, 교육에 대한 열정은 어느 민족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모두 묵시적으로 자부심(?)을 가진다. OECD 수학 성취도 평가 시험을 푸는 둥 마는 둥 하며 제출해도 여타 국가들을 뛰어넘는 성적을 달성하는 우리나라.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라는 모 CF 광고의 질문에 답변은 어쩌면 배달이 아닌, 시험의 민족이었어야 함이 틀림없다.

만들어진 전통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시험과 속도의 민족이라 생각한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SKY캐슬> 등장인물의 행동에 전혀 낯설어하지 않고, 현실은 저거보다 더 하다며 공감하는 이들도 종종 주위에서 봤을 것이다. 물론 현실과 동일시하기에 과도한 설정은 존재한다. 흥미 유발을 위한(혹은 다음화를 계속 보게 하기 위한) 장치들은 도처에 설치돼 있다. 비록 초반부 밖에 못 봤지만, 아들의 절연(絶緣)에 충격받은 이명주(김정난 분)가 눈밭에서 자살한 마지막 장면은 몰입도를 극대화시켰다. (실제로 2화부터의 시청률은 급등했다.)


1화의 마지막 장면, 거침없이 2,3화를 본 기억이 난다.


우린 왜 고등학교의 좋고, 그름의 척도를 서울대 입학생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일까? 이것이 “만들어진 전통”임을 깨닫지 못한 채 왜 숫자에 매몰되는 것일까? 아무리 인구와 국가경쟁력은 양의 상관관계에 있다지만, 이것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점을 왜 망각할까? 단지 상관관계가 들어맞는 가능성이 높아서 으레 학교도 마찬가지라 여기는 것일까? 아님 진학 평가가 좋은 곳으로 가면 더 “체로 걸러진” 아이들을 접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일까? 그렇지만 “체로 걸러진” 존재들이 정작 악화(惡貨)인 경우도 흔하지 않을까? 악화는 결국 양화(良貨)를 구축하듯, 커트라인 없는 착각 속 자신들은 선민(選民)이라 자만하는 아이들도 자뭇 많지 않을까? (이런 애들이 없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거다.)

그럼 추세를 가속화시킨 건 학부모들인가? 지금은 많이 개선됐을 수도 있지만, 고등학교의 교내 전통과 역사보다 몇 명이 인-서울(In-Seoul)권으로 진학했는지가 해당 학교의 제1평가기준이었다. 학부모가 아니라면 주범은 미디어일까? 정시 비중이 높을 적, 메이저 신문사에서는 서울대 입학생 숫자를 내림차순으로 제시하며 전국 고등학교에 등수를 매겼다. 메이저 신문사에 들지 못한 여타 고등학교는 마이너 신문사를 통해 “학급 당 비율”은 우리가 더 높다며 반박했다. 그럼 학교 간 경쟁이 문제인 건가? 학과 불문 '좋은 대학'에 붙으면, 학교에서는 플래카드를 제작해 온 동네에 붙여줬다. 다년간의 체화(體化)된 빅데이터로 좋은 대학으로 진학할 만한 학생들에게 교사가 역으로 알랑방귀 뀌는 경우도 자뭇 많았다. 셋 다 당연히 자기는 잘못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 누구의 잘못일까? 학생의 잘못일까?


서로 서로 결백하다고 말하는 형세는 결국은 모두 일정 부분 잘못이 있는게 아닐까? Mexican Standoff와 다를게 없다.


좋은 학생 유치를 위한 ‘경쟁 아닌 경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무작위 추첨(일명 뺑뺑이)으로 진학하는데도 말이다. 유명세를 힘입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고등학교는 이제 전통을 만들어갈 '특권'을 지닌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꼴통"이라고 불리던 고등학교들일지라도 "명문" 고등학교로 환골탈태한다. 절묘한 재개발의 입지성 혜택이든 입소문을 타든 상관없다. 이미지와 인지도만 쌓이면, 전통은 알아서 따라온다.


알게모르게 우린 숫자 속에서 만들어진 전통을 따르고 있는게 아닐까? 좋든 나쁘든 19세기 말부터 모든 것이 도매로 묶여 사라진게 한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학생의 몇 퍼센트가 어느 대학에 진학하고, 어떤 학부모가 그곳에 진학시키는지'만'이 좋은 학교를 가르는 척도가 돼버린 것 같다. 내세울 거라고는 “체로 걸러진” 학생들이 많이 유입된다는 장기추세(secular trend)밖에 없는 고등학교로 다들 점차 진화한다. 학생들을 위한 장(場)은 묵살된다. 동아리가 있다고 반박하겠지만, 생기부에 한 줄 더 적기 위해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 않은가? 너무나도 불편한 진실이지만, 사실이라는 점 우리 모두 수긍할 것이다.


이튼 칼리지 시절의 윌리엄 왕자. 이후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로 진학한다. 그의 입학이후 여성 입학비율이 한동안 급격히 늘은 웃픈 이야기도 유명하다.

행여나 말하지만 필자는 명문고나 특목고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의도를 떠나서 말이다). 수학(修學) 능력이 뛰어난 책임감 있는 학생들이 그곳에 들어가 학창 시절을 보낸다면, 분명 사회의 선순환은 일어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영국의 이튼 칼리지 같은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의 경우, 웃음이 동반되지 않는 진리는 진정한 진리라 부를 수 없다고 가르친다. 매사 모든 것을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자는 곧 사고의 유연함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꼿꼿할수록 부러지기도 십상이다. 인간적인 아마추어(amateur)의 모습을 가지는 사람. 그리고 자기의 일을 사랑하는 아마추어(amateur)적인 면모. 그 자가 진정한 노블(Noble)이다.



물론 영국은 한국보다 귀속적 자본이 더 중요하기에 계층이 올라갈수록, 폐쇄성은 높아진다. 한편, 이런 교훈이 20세기 이전 대영제국의 뛰어난 외교술의 기틀이 돼 글로벌 패권자로 군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cf) 귀속적 자본 - 집안 대대로 유전되어온 가문의 유산(Heritage)과 명예(Reputation) 뿐만 아니라, 전통농경사회 속 혈연을 배경으로 발전한 사회자본을 통칭합니다.



노블은 귀속적 자본과 학업 성적은 기본으로 가져가되, 체육과 문학에도 능해야 한다. 고등학생이지만 럭비(Rugby)이나 폴로(Polo)는 필수이며, 독서와 작문은 병행돼야 한다. 유연한 생각을 함양한 지덕체 겸비의 교양인. 그것이 영국의 노블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어지던 학풍을 영국은 몇 백 년 전부터 실천 중이다.


과격하지만 그만큼 동지애는 늘어나는게 스포츠다.


그렇다면 효율성과 영재반의 “체로 걸러진” 아이들이 마치 이 시대의 총아(寵兒)마냥 선민성을 함축하는 것은 올바를까? 거푸집에 찍어내듯 나온 그들은 올서독스(Orthodox)한 사고만 할 수 있을 뿐, 어떠한 유연한 사고가 존재하기 힘들지 않을까? 잠시 실화인 이야기를 하나 공유하고자 한다.


프랑스의 일부 목장에서는 염소들의 뿔을 어릴 때 불태워 없애버린다. 뿔이 있는 채로 자라면 서로 들이박아 염소젖을 착유하는데 애로(隘路) 사항이 많기 때문이다. 뿔이 있는지도 모른 채 자란 염소들은 온순하게 공장 안으로 들어가 기계가 착유하기 용이하게 서서 대기한다.

면에 자연에서 방목해 키운 일부 목장에서는 염소들이 매우 정력적이다. 초지를 염소들과 뛰어다니며 풀을 뜯어먹는다. 밖으로 나갈 일이 있지만, 말이 농장주를 대신해 항상 경비한다. 착유도 농장주가 수작업으로 진행한다. 뒷발질을 종종 하지만, 염소들은 협조적이다. 당연히 염소의 뿔은 함께 나이를 먹는다.


생각할 능력을 거세당한 채 권위자의 견해를 빌려 자신의 위치를 입증하는 아이들을 과연 "체로 걸러진" 존재라 칭할 수 있을까? 이런 아이들일수록 본인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 자만하는 경우가 왕왕(往往) 있다. 빈 그릇을 넓히질 못할 망정, 오히려 더 줄이고 그릇된 것들만 담는 격이다. 불쌍한 존재의 정의에 사회적 합의는 없다. 한편, 용솟음치던 생각과 상상의 나래를 '자의 반 타의 반' 꺾인 자들이 가장 불쌍한 자들이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남은 건 귀속적 자본을 통한 야합(野合)뿐이다. 입헌군주제 영국보다 귀속적 자본이 덜 필요한 대한민국이지만, "내 아빠가 누군지 아냐", "나 경찰 빽 있어"와 같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들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민낯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작은 사회인 학교에서는 덜 하랴. 생계유지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생(시민)들은 우리 사회를 더 극적이게 비출 개연성이 높다.



물론, 자만할 패기가 있다는 건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올 대담한 용기도 가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한없이 자만하는 사람도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좋은 것에서 좋은 것만 나오지 않듯, 나쁜 것에서 나쁜 것만 나오지도 않는다. 잘잘못을 떠나 변화의 ''가 중요하다. 현대 예술의 아방가르드(Avant-Garde)가 포스트모더니스트라면, 교육의 아방가르드는 선생님들이어야 한다.

힘들지라도 새로운 것을 향한 궁리는 계속 이뤄져야 한다. 뒤샹과 <샘>

효율적 지도편달도 중요하지만, 틀 밖의 생각도 할 수 있으며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학생들을 만드는 것은 더 중요하다. 마냥 말랑말랑하게 학생들을 대우하라는 뜻이 아니다. 교권의 시의적절한 활용(Prudence)은 필수적이다. 틀은 나이가 들수록 굳어져 간다. 하루라도 덜 딱딱할 때 확장시켜야 한다. 이런 사실을 익히 아는 서방권 국가에선 오래전부터 선생님을 신뢰하고 존중한다. 선생님이란 직업이 이렇게도 멋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오늘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알 수 있듯 말이다.



참고로 동아리를 통칭하는 Society는 주로 미국보다 영국에서 활용된다. <Dead Poet Society>는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닌, 죽은 시인 연구회가 더 맞는 표현법이다. 영국식 표현을 차용한 미국 영화 <Dead Poet Society>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는 영국의 전통을 그대로 이식하려는 미국 고등학교를 그리고 있다. 도처에 보이는 스코틀랜드 국기와 흡사한 문양들, 4개의 원칙(Excel, Tradition, Discipline, Honor), 그리고 저녁 식사 회랑 장면은 St. Andrews와 Oxford를 교묘하게 합쳐놓은 것만 같다. 장소만 유사할 뿐, 그 속은 완전히 다르다.



대다수의 교사들은 영국식 억양을 살려가며 영국 상류층의 복식(服飾)을 따라 한다. 기실 이너-베스트(Inner-Vest), 보우 타이(일명 나비넥타이), 그리고 중절모는 노블의 상징이다. (아무리 리버럴한 해외 시상식일지라도 상기의 것 외에 최소한의 복식 규정은 갖춰 참석한다.) 맥락 없는 외삽된 전통이라 여겨지는 순간, 표상만을 쫓기에 바쁘도록 만든다. 그들은 이런 복식마저 으레 당연한 것인 마냥 자신들의 지위를 음미하고자 한다. 정작 영국에서 수학한 신임 교사(존 키팅)는 미국식으로 발음하고 비즈니스 슈트를 입는데 말이다.


영국식(좌) vs 미국식(우)

영국적이고자 노력하는 Welton Academy지만, 안타깝게도 입학식 축사부터 매우 미국적이다. 몇 퍼센트의 학생이 유수의 대학교로 진학했으며, 원조(Original)와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짧은 역사 속 그들만의 헤리티지를 내세운다. 이 학교로 온 이상, 밝은 장래가 보장된 것처럼 포장한다. 지극히 자연주의 철학적 인식이 내재된 발언들이다. x축과 y축 그래프 상의 추세가 미래에도 당연할 것이라 여기는 일차원적인 예측은 결국 성과를 위한 수단은 정당화된다. 엄격한 규율은 당연하게 여겨지고 압축적 지식 전수만이 이뤄진다.


하지만, 존 키팅 교수가 부임되면서 달라지는데..



학창시절을 St. Andrews에서 함께 보낸 그들. 결혼 당시 여러의미로 세기의 웨딩이라 불렸다.

사담이지만, 미국 대학과는 달리 영국 대학은 학기 당 과제 개수가 한정적이다. 에세이 주제는 최대 한 달 전에 공지되고, 궁금한 건 교수님께 막역하게 물어볼 수 있다.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다면 말이다.). 동시에 학생들만의 문화를 만드는 데에 적극적이다.


St. Andrews를 예를 들었는데, 600년이 넘은 그 대학은 영국 순위에서 매년 학생 만족도 분야에 1위를 놓친 적이 거의 없다. 심지어 학생회에서 학교 운영진들과 협업해 Raisin Week을 개최한다. 그 기간 동안 자신만의 Academic Family를 만들어 학년 상관없이 단결할 기회를 가진다.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축제는 어느새 학교의 명물 중 하나로 거듭났다. (매년 BBC에서 취재한 기사들도 종종 보인다.)

Raisin Week의 꽃 Foam fight

전통(Tradition)과 'Ever to Excel'을 외치는 St. Andrews이지만, 시대에 따른 discipline을 적절히 변주해가며 honour을 지켜나간다. 학생들이 학교의 주인이란 말과 노블한 학교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번에도 분량 조절에 실패했다. 간결하게 적는다는 게 정작 풀어넣고 싶은 건 갈수록 많아져 비곗살 같은 글이 된 게 아닐까 걱정도 된다. 무엇보다 다듬는다고 다듬은 게 행여나 곡해될까 조심스럽기도 하다. 아무런 감흥이 없던 글이라면 기탄없이 댓글로 견해를 남겨주길 바란다. 독자분들과 엄연히 함께 커가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장으로 개설한 브런치니 말이다.


등장인물에 초점을 맞춘 글로 파트 1에서 찾아뵙겠습니다. 끝까지 제 글을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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