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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Apr 01. 2022

어디로 가야하오(죠) Part. 1

탈각(脫殼)은 곧 이성의 시작

(앞의 Part.0를 읽고 보시면, 더 풍부한 감상을 하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belleatriz/10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中 <지그프리트의 죽음과 장송행진곡>, SS 단장 하이드리히의 장송곡이자 히틀러가 들은 최후의 음악으로도 유명하다.


더 이상의 리 신(Lee Sin)과 주기적 리듬(Cyclical Rhythm)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1453년은 중세시대의 임종을 고한 것과 동일하다. 이제 본격적인 개인의 성찰과 존재 이유를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그리고 ‘죽음’은 임종의 순간에 맞춰 그들의 목숨을 거둬갈지라도 예전처럼 어딘가에 매몰되지 않는다. 하지만 <제7의 봉인> 속 등장인물들은 중세인들이다. 그들에게 종교만 존재할 뿐, 철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물결표(~)는 부정(not)을 뜻한다. 형식상의 분류일 뿐, 개인의 분류법은 다양할 것이다.


  영화 속 중세시대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다. 여기엔 이성도 개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루하루의 안위(安慰)를 위한 욕망과 금욕, 기독교에 신실하지 못한 자와 신실한 자만이 존재한다. 시국(時局)이 시국인 것일까? 당연히 명상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위 사람의 생사마저 무감각하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지만 신실하지 않던 기사의 종자는 생사불명의 아내는 금방 잊어버린다. 그는 위기 속에서 새로운 부인을 맞이하며 종착지인 기사의 성으로 향한다. 마찬가지로 기사와 종자를 십자군 전쟁에 참전(參戰)하도록 전도한 신자는 변절해 부장품을 훔치며 삶을 연명(延命)한다. 이들과 달리 과도한 금욕과 교조적인 신앙심을 가진 신자들은 이 욕망 가득한 세상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신실(信實)치 못한 신앙심을 탓하며 채찍질하며 국토를 순회한다.


촌철살인 같던 쇼펜하우어는 울버린과 다를 바 없었다. 헤겔과는 다른 접근법으로 칸트의 주장을 분석한다.


욕망을 욕망하는 세계. 이곳은 쇼펜하우어가 그린 세계다. 기존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규명하고자 이성부터 들이밀지만,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물자체는 곧 욕망의 결정체라 역설한다. 그가 바라본 인간은 이성이 존재할지라도, 폭주하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를 통제하고 있다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욕망을 충족하는 순간에만 이성이 제어하고 있다 믿을 뿐, 그 이외에는 늘 고통 속에서 결핍의 삶을 살아간다.

각자의 욕망에 대한 갈구를 그리고 있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뮤지컬식 연기와 메소드 연기의 전환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명작으로도 유명하다.

충족과 결핍의 순환. 쇼펜하우어는 내면의 명랑함과 인식을 넓혀가는 과정을 통해 극기(克己)의 삶을 살아 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제언한다. 마치 ‘용의 힘’을 제어하는 리 신처럼 말이다. 물론 리그오브레전드(LOL)의 공식 설정에서 리 신이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기틀로 해 주조해낸 피조물이라 제시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흡사한 점이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자체 : 인식 주관(認識主觀)에 대립하여 나타나는 물리적 물체가 아니라, 인식 주관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생각되는 물질을 뜻한다. 칸트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칸트는 이것을 감각의 원인으로 보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인식할 수는 없는 것'이라 하였음. - 출처 : Google 



쇼펜하우어는 기악(器樂) 감상과 명상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절개하길 제언했다. 기악 감상을 통해 탈각(脫殼) 상태로 돌입할 수 있지만, 이는 일시적일 뿐이다. 지속적인 탈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명상이 필수적이다. 안타깝게도 쇼펜하우어는 18세기 사람이다. 중세시대에는 철학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대다수의 정주민(定主民)들에게 오직 종교만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표였다.

 

예술을 위한 음악은 존재해서는 안된다. 신을 위해서만 모든게 허용됐다.


극단원의 기악으로 일시적으로 탈각 상태에 돌입해야 할 농민들은 정작 교조적 신자가 부르짖는 노래에 눈물 흘린다. 기악을 통한 카타르시스마저 존재하지 않는 음악 속에서 탈각 상태로 돌입하기에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신자의 음악은 오로지 원죄(sin)만을 표현한다. 그리고 기도하라 경고한다. 덕분에(?) 중세시대의 하루하루가 쌓여 사유의 부재는 차츰 악화되기만 한다. 사유의 부재는 신자와 종자, 그리고 교조적 신자뿐만 아니라 기사에게도 해당된다. 사유의 순간이 극도로 제한된 음악만이 오로지 허용되는 여기. 이곳은 중세시대다.



신실하며 신의 실존과 영생에 대한 믿음을 가진 기사는 죽음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한다. 죽음과의 체스게임 그 자체가 생명(삶과 죽음)의 그 경계를 궁리(窮理)하는 중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아무 수도 두지 않고 차례를 넘기고 싶지만, 악수(惡手)를 강제해야 하는 차례를 추크츠방(zugzwang)이라고 한다. 게임이 시작한 순간 그의 모든 수가 “악수 강제”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기사는 이길 수 있으리라 믿는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 자만한다. 사유의 부재. 경마 위의 말처럼,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오직 끝으로 달려가기만 한다.



기사는 성당에 들어가 진실을 구하기 위해 고해성사한다. 신의 존재와 사후(死後) 영생은 존재한다는 것을 신부로부터 보장받기를 원했다. 무엇보다 인생의 목적이던 십자군 전쟁에서 회군한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한편, 신부는 사실 죽음이었다. 그는 전지한 존재도, 전능한 존재도 아니라 역설한다. 쇠창살을 두고 이뤄지던 기사와 죽음의 대화는 생명에 대한 고찰을 극대화시킨다. 연역적으로 죽음 후엔 영생이 없다는 것을 죽음이 증명하지만, 기사는 인정하지 못한다.



이제 죽음은 귀납적으로 증명한다. 그는 시간에 맞춰 임종의 순간에 나타난다. 죽음을 앞둔 자가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은 본인임을 증명시켜준다. 하늘에서의 빛이나 신의 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자와 비(非) 신자를 가리지 않고 저승사자는 어김없이 목숨을 갈취하러 다가온다. 극단 연극이 예정해 있을지라도, 악마가 보이는 마녀라 할지라도, 인생은 유한하다는 점을 묵시적으로 제시한다. 죽음의 언행이 필요충분의 논증임에도, 기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神)을 찾는다. 기도를 올리며 이 순간을 회피하고자 한다. 죽음은 공정하다. 아주 약간만 기다려줄 수 있을 뿐이다. 이제 기사를 포함한 사유의 부재가 만연한 자들 모두 그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른다.



이들과 달리 극단원은 종교에 신실하지도 않고 (상대적으로) 욕망의 고리에서 벗어나 있다. 종교를 제일 멀리한 그들은 극 중 유일하게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존재를 영접한다. 동시에, 죽음의 존재도 먼발치에서 목격한다.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처럼, 오히려 숲에 들어가지도 않은 그들이 종교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지만, 극단원들은 종교에 감화되지 않았다. 종교는 '종교'였을 뿐이다. 그들에게 초기 형태지만 개인이 독립된 한 개체로서 존재하도록 만들어주는 개인주의가 내장되어 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동의어가 아니다. 한 사람으로서 오롯이 서 있을 수 있으며 동시에 다른 이들의 논리도 수용해줄 수 있는 것. 이것이 개인주의이다.



예술을 즐기며 초보적인 탈각 상태를 경험하지만 괜찮다. 한 발자국 내디딘 것에 불과하지만 그 이후는 거침없을 것이다. 그들이 이뤄낸 것은 아이가 이어받아 더 꽃 피울 테니. 종교에 의존적이지 않고, 예술을 추구한 극단원들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근대(Modern Era)를 준비하는 자들이다.


철저한 개인위생 준수는 방역수칙의 기본이다.


코로나가 800년 동안 인류와 함께 공존해왔다는 사실을 혹시 아는가?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이라면 흑사병이 퍼지기도 훨씬 전이다. 인간에게 전파되지 않았을 뿐, 우린 치명적인 세균들과 공존하고 있다. 과거부터 자연을 개발하면서 질병에 걸리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다만 개발과 세계화의 가속화로 전 지구적 질병전파는 이제 흔한 일이 될 것이다. 당연히 동토에 갇혀진 고대의 바이러스들이 지구 온난화로 인해  다시 기지개를 켤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지금은 거리두기를 거의 해제해 많이 완화됐지만, 너무 안이한 유럽당국의 초동조치는 많은 이들을 우울증에 빠뜨렸다.


COIVD-19가 전지구를 감염시킨 지 어느새 만으로 3년이 다 돼간다. 2019년을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 명명한 어느 한 NYT의 기자의 말처럼, 우린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것만 같다. 비대면의 활성화를 통한 야외활동의 증가, NFT의 등장, 의료기술 발전이 이뤄졌지만, 동시에 개인의 고립화와 경기회복을 위한 양적완화의 부작용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심지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서방 주도의 경제체제와 러시아 주도의 경제체제의 치킨게임으로 전환되고 있다. 자연히 금리인상의 변동폭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이뤄질 가능성이 높고, 버블 팽창은 느린 속도로 꾸준히 진행될 것이다.


전쟁통인 와중에 한국은 포켓몬 빵이 대란이 일어나는 아이러니. 정(情)넘치던 우리 국민성은 어디로 간걸까? 해외대학가에서는 Pray for Ukraine이 오래전부터 진행중이다.


격동의 세계사 속에 중요한 분기점에 서 있는 2022년. 우리들은 과연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우린 마지막 중세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르네상스의 신인류가 될 것인가?  안타깝게도 '벨'스트라다무스가 아닌 필자는 예측해줄 수 없다. 우리가 기사가 될지 극단원이 될지는 필자와 독자의 손에 달려 있다. 위기일수록 기존의 기득권 체제의 안정감을 보장해주는 포퓰리스트, 권위주의 체제의 득세는 가속화될 것이다. 이를 대비한 철저한 개인주의는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기주의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라는 점. 다시 한번 강조한다.)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 -  <인터스텔라> 中


cf) 종교적 관점에서의 <레옹>을 보고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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