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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Mar 29. 2022

어디로 가야하죠(오). Part. 0

아저씨 //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 달리면 - 김연우 <이별택시>中


사담이지만, 원(原) 가사는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 할증인가요 말은 달리네"였다고 한다.

김연우의 대표 명곡 중 하나인 <이별택시>를 흥얼거리며 들어온 분들을 위해 이 노래를 첨부한다. 안타깝게도(?) <이별택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도록 하자.


Lee는 그리스 어로 빈 터를, Sin은 영어로 죄악을 뜻한다. 게임 캐릭터는 이처럼 어근을 내포한 채 만들어진다.


“어디로 가야하오.”


온라인 게임에 관심이 있다면, 저 대사를 안 들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2010년대 초 한국에 입성해 오늘날까지 게임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게임 LOL의 대표 캐릭터 리 신(Lee Sin)의 대사 중 하나이니 말이다.


“우리가 얘를 굳이 알아야 해?”라는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시는 분들은 당연히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잠시 리 신의 배경 설정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해보고자 한다. (행여나 있다면, 인내심을 가져주시길 바란다..)

기본 형태의 리 신. 동영상의 모습은 능력이 개화할 당시로 추정한다.

리 신은 '용의 힘'을 부릴 줄 아는 캐릭터로서, 그만큼 용과 완벽하게 교감을 이룬 존재는 없다고 불리는 소승(小乘)이다. 용은 해당 세계관에서 가장 숭상(崇尙) 받는 영혼이다. 일각에서는 용이 파멸을 상징한다고 믿는 반면, 부활을 상징한다고도 여긴다.


소싯적 단편적인 힘만을 갈망하던 리 신이지만, 수도원을 위기에서 구한 반대급부로 깨달음을 얻는다. 필멸(必滅)의 존재인 인간이 용을 완전히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생사(生死)가 오가는 위기 속 '용의 힘'을 쓸수록 그의 피부는 그을려졌고 눈은 멀어졌다. 끝내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리 신은 의연했다. 욕망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일까? 이제 그는 매일 넓은 공터에서(Lee) 자신의 욕망이란 죄악(Sin)을 벗어나고자 명상에 빠진다. 나아가 자신 속 용의 영혼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


이젠 전설이 되버린 한국의 무협만화 <용비불패>, 오늘날까지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용의 힘’이라고 단순히 무협만화 속 문파에서 전래되는 무공비급(武功秘笈)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파멸과 부활이 양립하는 힘이란 두 개념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용. 용의 형상은 필경 우로보로스(Ouroboros)와 비슷할 것이다. 기실 우로보로스의 상징 자체가 불교의 윤회를 상징하지만, 여기선 살짝 비튼 것 같다. 리 신 스스로 이것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으로 미뤄 보아, ‘용의 힘’은 생명을 의미할 것이다. 용머리가 꼬리를 먹는 그 경계 어딘가를 헤매는 것. 이것이 본질적인 ‘용의 힘’이 아닐까? 나아가 죽음은 숙명이라 직시한 채 욕망과 함께 뻗어 나가는 번뇌를 제어하기 위한 명상훈련에서 쇼펜하우어가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생전에 쇼펜하우어는 불상을 늘 곁에 두고 지냈다고 한다). 죽음과 함께 하며, 리 신은 삶의 의미를 가다듬는다.


우로보로스의 형태. 무한, 회귀를 상징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던 리 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힘만을 갈구해 서고에서 비급(秘笈)을 꺼내던 어린 시절의 모습도 사라졌다. 평온한 감정만이 존재한다. 이제 그의 명상훈련은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욕망을 벗어나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을 위해 명상은 진행된다. (쇼펜하우어도 욕망을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인 방법으로 음악 청취를, 지속적인 방법으로 명상을 제언한다.)


"비록 앞은 못 보지만, 진실은 꿰뚫어 볼 수 있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리 신처럼 중세를 지난 인간은 죽음을 자각한다. 인간은 모두 죽음이란 공통의 목적지로 향한다고 인식한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아무도 없다. 목적지는 같지만 방향은 전부 제각기다.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Memento Mori를 마음속에 새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위대하든 안 하든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철학이다. 사유로 풍성할수록 가는 길은 더 좋을 것이다.

<원피스>의 명장면. 돌팔이 의사인 그이지만, 늘 따돌림받는 쵸파(아래의 사슴)을 제자로 받아들여 감싸준다. 그는 쵸파의 의사이자 아버지이자 친구이다.


사유에 대한 평가는 사후(死後)에 이뤄진다. 인간은 죽어서 말한다. 한 사람의 죽음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지만, 그 사람이 언제 어떻게 임종했는지는 남아있는 자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기억될지를 결정한다. 개인주의가 별 다른 게 아니다. Cogito Ergo Sum의 시작. 개인을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철학의 순기능 중 하나이지 않을까? 라 필자는 생각한다.


너무 핵심 부분만 골라서 게시했기에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도 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꼭 이 부분을 찾아 읽어보시길 바란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눈물콧물이 다 나온다.


이와 달리, 종교는 인간이 합심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영화의 설명을 위한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어떠한 쟁의(爭議)의 목적이 없음을 미리 밝힌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신에게 더 귀의(歸依)하고자 하는 열망은 커진다. 적정의 신앙심은 당연히 좋지만, 교조적일수록 그 파급력과 파괴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중세시대의 종말은 다가온다


역사적으로 십자군 전쟁 시기부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에게 함락되기 직전까지, 그들의 신앙심은 교조적으로 변화했다. 교황의 권위와 권능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고, 사람들의 종교적 귀의에 대한 갈망도 마찬가지였다. 원인불명의 흑사병(Pest) 발발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과, 병력의 안위는 안중에 없는 성지(聖地) 탈환을 위한 종교적(이자 정치적) 전쟁에도 신앙심은 더욱 견고해진다.


격리(quarantine)기원도 흑사병에서 시작했다. 흑사병 전염 방지를 위해 바다의 배에서 40일간 몸상태를 보고 입국결정을 내렸다.

개인을 위한 성찰과 수양의 장소는 사라졌다. 창궐하는 역병으로부터 구원받길 간절히 기도하지만, 하늘은 무심하다. 디스토피아 같은 상황 속 종교에 교조적이지 않은 등장인물들은 살아남는다. 반면 종교에 교조적인 자들은 죽음에 이른다. 중세시대 기사와 죽음(생사)의 운명의 체스 한 판을 다룬 오늘의 영화, <제7의 봉인>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면 왜? 이게? 라며 심드렁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연출도 조잡하고,  화려한 CG도 없고, 너무 디스토피아 같으며 내용도 뻔하다며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왜 명작인지 알 수 있다. 너무 에둘러 돌아 돌아간다고? 조금만 더 인내하며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다 읽은 뒤에 뒤로 가기를 눌러도 늦지 않다.


중세시기를 좀 더 설명해보자면, 1453년을 기점으로 이슬람 철학자들 사이에서 계승되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기독교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 해당 서적들은 불타거나 불온서적으로 찍혀 수도원 깊은 곳에 숨겨졌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고전(Classic)을 읽을 수가 없었다.


두 철학자의 귀환은 금의환향(錦衣還鄕)과 같았다. 교조적인 기독교에 싫증난 사람들은 개인주의와 근대적 합리성으로 서서히 무장하기 시작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외친 프란시스 베이컨도 이 시대의 사람이다. 본격적인 인본주의로의 회귀가 시작된다. 기하학 기반의 그림이 창작되기 시작했고, 초기 형태의 상업이 성행했다. (화가들은 그림을 팔기 위해 인지도를 쌓을 필요가 있었다. 그 시절에도 자기 PR은 존재했다.)


시대는 다르지만, PR의 원조오브원조인 뒤러. 사진은 그의 자화상


뿐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원인불명의 역병으로 인한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생존자들에게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졌다. 자본의 축적은 귀족뿐만 아닌, 농노에게도 일어났다. 본격적인 영주와 농노의 관계 역전이 시작됐다. 증대되는 힘은 곧 중앙집권화의 동인(動因)으로 이어져 영국이나 프랑스에 중앙집권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시간이 조금 지나 백년전쟁에 곧장 돌입한다.)

티모시 살라메와 로버트 패틴슨이 나오는 <더킹:헨리5세>, 백년전쟁 말미를 그리고 있는 영화다. 뒤러의 자화상 속 자세와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종합하자면, 흑사병의 창궐은 많은 인명(人命) 피해를 입힌 사건임에 틀림없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 중심의 개인주의적 사고가 꽃피기 시작한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중세 흑사병이 르네상스, 계몽주의, 초기 중앙집권 국가를 배태한 것이다.




밀실 속에 감춰진 수상 선정 기준을 우린 알 수 없지만, 시대적 맥락을 통해 수상 이유를 약간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 1957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난 지 만 4년도 채 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도 종전한 지 12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미국에서는 매카시의 광풍이 불고 있던 중이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막 분기점을 돌아 세계는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리기 시작하던 때다.


금본위제의 회귀 얘기는 어제오늘이 아니다. 과연 탈중앙적 비트코인이 금과 달러와 동등한 지위를 가질 날이 오게될까?


 본격적인 미국 주도의 브레튼우즈 체제의 서막이 열린다. 케인지언의 “배태된 자유주의” (Embedded Liberalism)은 공산진영을 제외한 채 전 지구적으로 뻗어 나갔다. 금융의 고삐를 쥔 채, 왕성한 무역과 “금 1온스=35달러” 원칙은 적정 수준의 자유주의의 호혜를 지구에 뿌려주기 충분했다. 자유주의는 이제 스테디셀러(Steady Seller)가 됐다. 한국도, 싱가포르도, 타이완도 자유주의는 수입됐다. 다만 피터 에반스(Peter Evans)가 지적하듯, 위로부터의 지도편달 형식이었을 뿐.


17세기 네덜란드의 부흥기 속에서 바니타스(Vanitas)화도 함께 성행했다. 덧없음의 해골과 모래시계 그리고 경제버블의 상징인 튤립이 대비를 이룬다.


중세시대 종말 이후와 브레튼우즈 체제 시작의 유사한 듯 다른 주기적 리듬(Cyclical Rhythm). 자유주의의 서막의 시대를 그린 영화기에 <제7의 봉인>은 57년에 수상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런 시대적 맥락을 차치해도 좋은 영화임은 분명하다. 탁월한 카메라 움직임과 페이드-아웃(fade-out) 형식은 장면 별 의미 전달을 너무나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영화 리뷰인데 정작 리뷰 얘기는 아직 시작도 못한 점. 심심(深心)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수작(秀作)이라 오래전부터 얘기가 분분한 영화임에도, 이것과 관련된 밀도 있는 얘기를 아직 보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에 장문의 글을 쓰게 되었다. 앞의 리 신 이야기가 너무 붕 뜬거처럼 보이겠지만, 1부를 보면 이해되리라.


(행여나 밀도 있는 글을 찾게 된다면, 필자의 부족한 검색력에 지탄(指彈)하며 꼭 댓글에 링크를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분량 조절도 실패하는 사람인지라.. 분골쇄신(粉骨碎身)의 기회로 꼭 삼고 싶습니다.)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 내용 관련의 1부로 찾아뵙겠습니다.


(1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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