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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Mar 28. 2022

사람도 의자도 시간 따라 바뀐다. Part. 2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시몬스.

(1부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belleatriz/8


글에 영감을 주신 Kenny님의 글도 함께 첨부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Kenny님께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은 지금 전우애를 느끼는 중이다.

당연히 하먼 감독 혼자였다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는 달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균형자가 필요하다. 하먼 감독 옆에는 빌 감독이 존재했다. 국가에 비유하면 하먼 감독은 행정부에, 빌 감독은 입법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Sir이라 불리길 원하던 카리스마 적인 하먼 감독과 달리, 선수들을 Boys라 부르는 빌 감독은 선수 한 명 한 명의 권리를 존중한다. 아버지 같은 리더십.  어쩌면 그는 흑인들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동경했을지도 모른다. 흑인 선수들처럼 격식 없이 ‘소울파워’를 외치며 각자가 유대에 일조하는 그런 순수함 말이다. (영화 상에서) 두 감독 모두 서로 가지지 못한 다른 형태의 자유를 맛보고 싶어 상반된 감독관()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신이 겪은 시대적 구속을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빌 감독은 딸을 방목시키듯 키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딸은 시류(時流)의 여아들과는 달리 미식축구를 사랑한다. 아버지 옆에서 전술과 선수 분석을 자발적으로 대행한다. 이건 백인 선수들을 대함에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을 방목하되, 선발권이 보장받도록 계약으로 유지 및 관리되게 하는 것은 빌 감독의 최우선 과제이다. 선수들에게 선발권은 곧 재산권이다. 계약을 통한 방목지(선발권)의 유지. 빌 감독은 로키언적(Lockean)인 인물이다.


미숙하기에 하먼 감독에게 자주 핀잔을 줬지만 그녀는 미숙축구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해질 것이다. 행정부는 하먼, 입법부는 빌, 그럼 사법부는 누구인가? 선수들일 것이다. 형식을 갖추기 위해 사법부라 칭했지만, 좀 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행정과 입법기관에 의제를 던지는 기구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씨줄과 낱줄처럼 엮이는 그들의 관계는 다채로운 옷감으로 변환된다. 토크빌이 언급한 초기 미국의 모습은 이렇게 스포츠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게 진정한 “아메리칸 스타일”이지 않을까? 개인의 욜로(YOLO)와 플렉스(FLEX)만이 미국의 오리진(Origin)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 근시안적이지 않을까? (이것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한번 다뤄볼 예정이다)

007의 상징같던 Rollie는 이제 레퍼의 상징이 된다.

어쩌면 (영화 초반부에서) 흑인과 백인의 갈등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 방목지의 유지를 위해 백인선수들의 리더인 게리가 하극상을 벌였으니 말이다. 백인 쿼터제를 주장하며 선발권을 빌 감독에게 이양하라 주장한다. 고등학교가 합쳐졌으니 계약을 소급해 “법대로 하자”는 거다. 한편, 빌 감독은 나서지 않는다. 감독들 간의 계약을 자의적으로 파기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기에 구법(舊法)을 원용하는 것은 빌 감독도 원하진 않았으리라. 그는 계약의 관리자일 뿐, 일일이 규칙을 제정해 선수들에게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다.


쿼터제는 홉시언(Hobbesian) 하먼에게 해당사항이 아니다.

상반된 성향의 두 감독이지만, 선수들 스스로 치고 박으면서 깨닫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한다. 플라톤의 아카데미도, 아리스토렐레스의 리케이온도 다 같은 맥락이다.


그 당시 대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서관 주위의 회랑과 노상은 대학가였고 토론장이었다. 대학이 따로 정해진 게 아니다. 4년 다녀서 종이 쪼가리만 얻는 게 끝이 아니란 말이다. 큰 배움을 얻을 결과까지의 시간을 제공해주는 것. 그리고 한 번이라도 제대로 완수할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 그곳이 곧 대학(大學)이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완수하면, 잠재력은 폭발할 것이다.


지덕체(智德體)의 합일의 장을 마련해준 훈련장소로 게티즈버그 대학교가 등장한 것은 분명 이런 이유일 것이 아닐까? 훈련장에서 그들은 문화 시민으로 거듭난다. 그들은 서로의 문화마저 포용할 수 있게 된다. 서슴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친근감의 표현이라 볼 수 있는 흑인 특유의 농담은 백인 선수들도 더 이상 민감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랄트 뮐러(Harald Müller)가 주장한 ‘문명의 공존’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알아야 사랑하듯, 그들을 서로 사랑하게 된다.

선입견(先入見), 편견(偏見) 가득하던 첫만남

흑인은 무조건 편부모 가정의 무소득 계층이라 규정했지만, 선입견(先入見)에 불과했다. 흑인 선수들의 선명성을 대표하던 ‘소울 파워’는 오직 그들만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라 백인선수들은 편견(偏見)을 가졌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앞에 선입견과 편견은 무너진다. 백인선수들도 ‘슈퍼맨 파워’ 외치며 ‘소울 파워’에 합심(合心)한다. 이제 경기장에 등장할 때마다 같은 노래에, 같은 복장을 입고, 같은 춤을 추며 등장한다. 칸티언(Kantian) 유기체 연성은 성공했다.


인종, 성소수자, 히피 상관없이 모두가 원팀(one-team)이 된다.


고유의 선명성을 강조할수록 ‘구별 짓기’는 필연적으로 강화된다. ‘구별 짓기’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허먼 감독의 팀을 보라. 그들은 사회와의 ‘구별 짓기’로 흑백논리는 무의미하다는 점을 역사 속에서 입증했지 않은가? 실존은 본질을 우선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명심하라.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결국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따라 판단된다. 만약 허먼 감독의 팀이 인종의 선명성을 이유로 서로를 적(敵)으로 구별했다면, 이미 난파선이 됐을 것이다. 합칠 때는 합쳐야 한다. 찰나의 불쾌함과 짜증으로 야합(野合)하라는 게 아니다. 개인의 단위일지라도 합치는 데는 거대담론이 필요하다.


일본 만화 <아이실드21>. 필자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주던 만화다. 불완전한 그들이기에 역설적으로 함께할 수 있다. 서로에게 느낄 수 있는게 다채로워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하등 잘난 것이 없음에도 남들과 다르다는 착각에 빠지는 순간, 커트라인은 한없이 올라간다. 적정의 ‘구별 짓기’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라도 인지한 자라면, 임계점이 어디 즈음인지는 당연히 알 것이다. 누구든 내심(內心)의 자존심은 있겠지만, 오만한 콧대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악의 어머니는 지식일 수 없듯, 정의는 무지의 딸일 수 없다"는 말을 마음 속으로 세기길 바라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다음의 장면은 게리가 흑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그의 여자친구와의 대화 장면 중 하나다.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

Listen, When something unexpected comes, you just gotta pick it up and run with it.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중이면, 받아들이고 달려 나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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