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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Mar 27. 2022

사람도 의자도 시간 따라 바뀐다. Part. 1

의자도 바꿔 보고 자세도 고쳐 앉아는 봐야 한다.


백인의 전유물이던 포크(Folk)에 흑인의 전유물이던 힙합(Hip-Hop)의 조화. 예술성과 음악성은 한번에 잡았으니 역대 빌보드 핫100 최장기간 1위 달성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갑작스러운 모 유투버의 썸네일에 당황한 분들이 많았으리라 예상한다. 하지만 저 문구만큼 오늘의 주제를 꿰뚫은 다른게 생각나지 않아 부득불(不得不) 차용한 점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은 뒤로 한 채, 오늘의 장을 펼치고자 한다. (필자는 달걀은 닭이 되고, 닭은 다시 알을 낳는 사실만으로 이미 순환에 시작점은 없는 것이지 않을까? 라 생각한다. 여러분들의 생각을 댓글로 기다린다.)



Boy & Sir. 여기엔 슬픈 인종차별의 역사가 담겨있다. ‘총으로 세운 나라’라 미국을 칭하듯, 좋은 의미로는 개개인은 자구(Self-help)를 위해 총을 들어 자유(freedom)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개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에게도 서슴없이 총부리를 겨눌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경찰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인에게 익숙한 경찰은 19세기 초중반에 처음 정립되었다. 1775년부터 독립전쟁으로 투쟁해온 미국에 “개인의 안전은 스스로 지킨다”는 준칙과 다름없다.



총기 소지의 선순환으로 미국은 독립하지만, 악순환의 부산물도 자못 많았다. 특히, 인종차별이 심했던 남부지역에는 Slave Patrol이 항상 돌아다니며 (본인의 눈에) 의심스러우면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총살시키거나 교수형에 처했다. 이는 (본인의 눈에) 흑인들이 집단을 이뤄 의심스러운 행위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백인들은 흑인을 Boy라 하대하며 심문하고, 흑인들은 그들에게 Sir이라 존대해야만 했다. 나이는 숫자일 뿐, 색의 유무로 계급은 정해졌다.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라는 고사성어처럼, Slave Patrol에게 당한 경험변형되어 아직 남아있다. 순찰 중인 경찰의 갑작스러운 심문 또는 과잉진압을 접한 경우, 공분(公憤)을 사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남부지역에 주로 배치가 된 Slave Patrol. 보안관 뱃지와 형태가 유사

승리의 여신은 반-인종차별에 산업 유치론자들에게 미소 짓지만, 외삽된 갈등은 단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별적으로 사람들을 차별했다. 양차 대전에서 모두 전쟁터로 뛰어나갔음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어떠한 사회적 잣대가 없던 전쟁터에서 그들은 동지였지만, 사회로 돌아온 순간 각자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었다.


유색인종 차별에 반대한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진행된 비틀즈의 Gator Bowl 콘서트, 백인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노래를 듣게된다.


인생은 마치 진자운동처럼 움직인다. 한쪽으로 너무 움직이면, 결국 자연상태로 돌아가 평형을 유지하려 한다. 양차 대전의 공신(功臣)들은 구(舊) 체제의 최후의 승리자지만, 곧 베이비부머(Baby Boomer)에겐 구(舊) 체제의 마지막 산물이었다. 승자 일지라도 승리에 도취된 모습은 결국 누군가의 빈축을 산다. 본격적인 격동의 60년대 (Swinging Sixties)의 서막이 오른다. 기존 체제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전 지구적으로 이뤄졌다. 대내적으로 흑인 인권운동과 반전(反戰) 시위가 이뤄졌고, 대외로 탈식민주의로 인한 제3세계의 독립 물결, 샤를 드골의 권위주의적 행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린 68 운동이 일어난다.

Black Power Salute. 68년 맥시코 올림픽에서 흑인인권을 위해 손들다. 호주 출신 백인선수는 동조했다는 사실로 호주국적을 상실했다가 44년만에 호주로부터 사과받는다.

누군가에겐 이룬 건 없고, 사회적 물의만 많이 일어난 60년대일 수도 있다. 분명한 점은 더 먼 미래세대에게는 새로운 세상의 토대를 마련해줬다. “악의 어머니는 지식일 수 없듯, 정의는 무식의 딸일 수 없다”는 아크리파 도비녜의 말을 기억하길 바란다. 이제 1972년을 배경으로 한 <리멤버 타이튼>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Swinging Sixties를 막 지나쳤지만 새로운 씨앗이 발아될 수 있는 걸 반증하기 때문이다. 노소불문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청춘들의 감동 실화 스포츠 이야기를 담은 오늘의 영화, <리멤버 타이탄>이다.


영화의 OST는 오바마 전 대통령이 시카고에서 대통령 당선 연설할 당시 사용되었다. 그만큼 이 영화의 상징성은 남다르다는 것을 반증한다.


영화가 너무 클리셰적이라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보수적인 인식이 짙은 지역으로 흑인 감독 허먼이 부임해 일어나는 갈등과 화해의 에피소드가 ‘안 봐도 넷플릭스’라며 말이다. 한편, 그만큼 극적인 감정을 불러올 수 있는 것, 이 또한 클리셰의 특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우리가 쌀 먹기 싫다고 끼니마다 산해진미의 변주를 주며 밥을 먹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영화를 조금만 더 삐딱하게 바라보자. 영화는 홉시언적인 인간과 로키언적인 인간이 만나 칸티언적인 단위체로 합성된다고 해석될 수 있다. 너무 많이 간 것일 수도 있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주는 곳이 문학과 예술이지 않겠는가?

영화화 된 그들의 이야기. 영화보다 더 영화같다.

참고로 버지니아는 미국 내(內)에서도 (문화적인 면에서) 꽤나 보수적인 도시다. 미국으로 넘어온 영국인들이 주로 버지니아 인근에서 부락을 형성했고, 남북전쟁에는 남부 진영에 속해 북부와 전쟁을 치렀으니 말이다. 이런 주(州)에 흑인 감독이 새로 선임되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영화에서도 허먼 분이 이사 올 때, 이곳저곳에 숨어 뒷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백인이었다. 허먼은 정작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영화 초반을 보면, 백인 감독 빌은 자기를 따르던 백인 선수들을 boys라고 부르는 반면, 허먼 감독은 자신을 Sir이라 존대해라 흑인 선수들에게 명한다. Boy & Sir. 두 감독의 지휘 스타일은 위의 역사적 추세(Secular Trend)에 근거해 설정된 것이지 않을까? 마치 라이베리아(Liberia)로 넘어간 미국 출신 흑인들이 아메리코-라이베리안(Americo-Liberian)으로 백인들에게 하던 행위와 유사하게 따라한 것처럼 말이다. 혹은 영화 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흑인이었던 허먼 감독인지라 그 누구보다 자신의 성과를 더 보여줘야 했을 수도 있다. 유색인종으로서 차별의 아픈 기억이 있기에, 그 누구보다 더 존엄(dignity)을 지켜야 하는 아이러니. 그 마음에 누구보다 강하게 선수들을 다그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강하게 키우는 것, 그것만이 그에겐 생존의 방법이었다.

행위의 동인(動因)이 어떠한 것이든, 허먼 감독에게 사회는 야생의 자연 상태다. 자구(self-help)해야만 다. 나약함은 곧 도태를 의미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렇다. 그는 홉시언(Hobbesian)적인 인물이다. 현재의 교육 관념에서 본다면 다분히 올드 스쿨(Old School)한 모습도 종종 보인다.


60년대를 겪으며 리버럴한 사회가 담양 되고 있는 와중이지만, 여전히 인종 불문 수트에 이너-베스트(Inner-Vest)를 입도록 강조하거나 조종사용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윽박지르는 허먼 감독의 모습, 그리고 혹독한 훈련까지. 간혹 선수가 너무 안쓰러워 보인다. 개별 선수들의 권리를 위임받아 선발 명단을 짤 권력을 행사하는 리바이어던(Leviathan) 허먼이지만, 극단적인 홉시언은 아니다.


 그는 선발권만을 휘두르지 않았다. 단순히 체(體)'' 강조하지'' 않았다. 지덕체(智德體)를 선발 조건으로 내세워, 선수들에게 대학 진학할 성적,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수준급의 운동실력을 요구한다.

게티즈버그에 도착한 그들. 호국영령의 묘를 대면한다.

지(智)가 부족해 대학 진학을 못할 것 같다고 자책(自責)하는 백인 라스틱은 하먼 감독이 직접 지도 편달한다. 인종 간 불화로 인해 덕(德)이 부족한 선수들에게 화합을 강조한다. 인종 간의 화합이 아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화합을 역설한다. 남북전쟁의 각축장 중 한 곳인 게티즈버그 전장으로 데려가 그들에게 명시적인 진실을 고(告)한다. 1972년 현재 진행의 인종차별에 대한 논쟁은 이미 전쟁을 통해 오래전 종결했음을 말이다. 선수들은 흑백논리 자체가 무의미함을 포지션별 일대일의 멘토링으로 자연히 깨닫는다. 이제 연대는 극대화되고 적어도 경기장 안에서만큼은 모두가 자유롭다 인지한다. 문무의 겸비가 이뤄진 교양 있는 시민 양성. 고대 그리스 체육의 의의를 허먼 감독은 몸소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아래는 <돌아온 타이탄>의 명장면 중 하나인 첫 경기에 들어가기 직전 허먼 감독의 각오를 읊조리는 장면이다. 올드스쿨의 방식을 따르지만, 그의 생각은 누구보다 리버럴함을 입증한다.


Yeah, this is my sanctuary right here. All this hatred and turmoil swirling around. But this. This is always right. Struggle, survival. Victory and defeat.


여긴 저만의 성지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혼탁해도 이곳엔 진실만이 통하죠. 투쟁과 생존. 성공과 실패.



(2부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belleatriz/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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