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lleatriz Mar 25. 2022

이길 수 없다고 합류해서는 안된다. Part. 2

Bear the burden of twilight struggle

(1부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belleatriz/6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링크를 첨부한다. 이 자리를 빌어 깔끔하게 편집해주신 벤제마오른발님에게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거대한 맷돌은 잠시 개인의 삶을 보존시킬 여유를 준다. 지바고의 가족은 단란한 전원생활에서 생업(生業)으로 감자와 수선화를 가꾸며 살아간다. 두 식물의 꽃말처럼, 지바고는 가족에 헌신하며 쁘띠-부르주아로서 소신을 지킨다. 일말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농부가 됐다 합리화하지만, 맷돌이 이제 그만 멈추길 바랄 뿐이다. 일시적인 평화의 반대급부는 무료(無聊)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개인의 영감이 먼저인지, 아님 가족이 먼저인지, 방황의 시간이 시작된다.

자기애와 고결을 뜻하는 수선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를 뜻하는 감자꽃 (대표적인 의미들 중 하나일 뿐, 이외의 뜻으로도 꽃은 사용됐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뮤즈였던 라라를 은연중에 떠올린다. 혁명 간부 코마로프스키의 아이를 가진 그녀. 그들은 전우(戰友)였다. 그녀도 시류를 피해 인근 지역으로 도망쳐왔다. 지바고는 비정기적으로 그녀를 만나러 간다. “시대가 시대”라 그런 건지, 아님 이염에 물든 건지. 방향감각은 무뎌져만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냐의 임신소식에 감각은 다시 날카로워진다. 이제 라라에게 이별을 통보하러 발걸음을 재촉한다. 맷돌도 다시 휘몰아칠 준비 한다.


이별을 통보한 후, 가족에게 돌아가던 와중 지바고는 적군에게 붙잡힌다. 비자발적으로 군의관에 편제되지만, 보존해온 그의 소신과 존엄은 범람하는 시류에서도 여전히 빛난다. 그에게 정치적 편 가르기는 의미가 없다. 그에겐 모두 양귀비였다. 양귀비 꽃이 가득 핀 토지에 생존한 양귀비를 치료한다. 여전히 이념에 교조적인 사람도 존재했다. 개인의 삶과 문학작품의 폄하는 비록 진행 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차츰차츰 인간성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인터내셔널 가(歌)와 함께 휘날려진 체제와 감성은 독자적 메커니즘으로 대체되는 중이다. 그들은 대열을 이탈하는 지바고를 보내준다. 구(舊) 체제의 산물은 필요 없다는 듯 말이다.

쓰러진 병사라는 꽃말을 가진 양귀비(poppy), 사살당한 병사들은 흰 양귀비처럼 붉은 양귀비 옆에 같이 놓여진다.

하천은 산에서 시작해 일정한 길을 굽이쳐 하류로 흘러간다. 물은 홀로 흐르지 않는다. 풀무더기부터 시작해 땅에 박힌 돌부리까지, 함께 굴러간다. 하천의 끝자락엔 삼각주, 그리고 망망대해(茫茫大海)가 기다린다. 우랄산맥을 배경으로 시작한 영화는 이제 망망대해 같은 눈 사막으로 이어진다. 밑그림처럼 어렴풋하지만 명확하던 지바고의 삶은 다시 신기루처럼 아른거린다. 가족과의 생이별을 직감한다. 몇 달간의 강제징집이 원망스럽고 한스럽기만 하다. 대-전환. 슬프지만 권력 없는 개인은 오롯이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소명과 존엄(dignity)을 가진 자일 지라도 말이다.

전선을 이탈해 집으로 가는 길. 바다를 부유하듯 지바고는 표류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라라의 집. 그녀로부터 간호받지만, 슬프게도 기회주의자인 빅토르가 그들을 찾아와 조롱한다. 백군의 관료였지만, 이제 그는 적군의 혁명간부다. 그리고 이젠 동토의 지배자의 가신이 되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난다 으스댄다. 1917년 혁명 이전, 슈가 대디(Sugar Daddy)처럼 라라에게 접근한 그는 설탕(Sugar)을 가져와 라라를 유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라도 지바고도 거절한다. 우린 모두 진탕에서 태어났다 마지막으로 비웃으며 퇴장하지만, 선악과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

빅토르가 구애하던 때의 라라.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시기다.

이제 지바고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해바라기도, 적십자 완장도, 감자꽃도, 수선화도 말이다. 얼어붙은 동토 속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창작. 시 쓰기밖에 없다. 매일 밤이 되면 개와 늑대가 지바고와 라라를 찾아오지만, 투쟁은 속된다. "개와 늑대의 시간"의 시작과 끝인 황혼과 여명. 모든 걸 잃은 채 황혼의 맞지만, 여명을 향한 그의 투쟁은 지속된다. 하지만 괜찮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두렵지만 그곳으로 홀로 걸어가지 않는다. 희망의 여명이 올 때까지 뮤즈는 곁에 있어준다. 지바고는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라라는 둘째 아이를 가진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타냐(Tanya). 동토 위의 태초의 씨앗이다.



1961년 40대 초반의 나이로 백악관에 입성한 JFK


A call to bear the burden of a long twilight struggle, year in and year out, “rejoicing in hope, patient in tribulation”; a struggle against the common enemies of man – JFK 연설 中


지바고와 라라의 딸 타냐. 그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다.

이 아이는 곧 희망이다. 나아가, 러시아의 미래다. 크림슨 색의 뜨거운 민중의 마음을 가지며, 백군의 쁘띠-부르주아의 존엄(dignity)을 지닌 존재다.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으로 설정된 이유도 자자손손도 그 존엄(dignity)을 지키며 살길 바라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그녀의 아버지 지바고의 시를 통해 달성된다. 압당한 그의 시는 시대가 지날수록 빛을 보게 된다. 이젠 모두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조의를 표한다. 실로 황혼의 끝에 여명은 있다.

지바고의 시집.

주류와 달리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지 궁리한 시인 윤동주의 <참회록>으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물론 윤동주와 지바고를 동일인물로 둘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지식인으로서 소명과 존엄(dignity)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궁리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권력이 없었을 뿐, 사회적 책임(Noblesse Oblige)의 마음만은 가득했으리.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길 수 없다고 합류해서는 안된다. Part.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