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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Mar 25. 2022

이길 수 없다고 합류해서는 안된다.  Part. 1

암세포도 생명이지만, 덜어내야 사람도 산다.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링크를 첨부한다. 이 자리를 빌어 깔끔하게 편집해주신 벤제마오른발님에게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 리버풀의 성골 유스 마이클 오언이 라이벌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트(이하 맨유)로 옮기면서 한 말이다. 어린 나이에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화려한 개인 커리어를 가진 그였지만, 축구는 엄연히 팀(Team) 스포츠다. 빈약한 대회 기록 때문일까? 트로피가 목마른 그는 실언을 남기면서까지 맨유로 이적했다. 그가 은퇴한지도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리버풀 팬에게 애증(哀憎)의 선수로 남아있다.


마이클 오언. 리버풀 시절 그의 모습.


시(市) 단위의 라이벌 관계에서도 선수의 변절자 논쟁이 분분한데, 근대국가 단위로 확장될 경우 논쟁은 더욱 과격하리라. 1905년 을사조약의 주범들의 이름만 들어도 과(過)를 지적하지, 업적이라 칭송하는 이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물론 오언은 을사오적과 동일하지 않다. ‘규칙적’과 ‘규칙이 동일'한 건 다르다는 점을 잊지 말자.)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처럼, 사회적 지위에 올라간 사람에겐 준수해야 할 사회적 책임(Noblesse Oblige)이 있다. 단순히 두피 단위면적이 넓다고 물리적 무게를 쉬이 버틴다는 말이 아니다.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 을사오적의 단죄(斷罪)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Noblesse Oblige란 우리나라에서 쉬이 사용되는 일단 돈 번 기업들이 돈으로 사회에 페이-백(Pay-back)하는 것이 요체(要諦)가 아니다. 이건 용돈 더 달라고 떼쓰는 아이와 다를 게 없다. 어떻게 사회적 환원을 달성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기실 이 단어의 뿌리는 평민들 없이 자신들은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귀족에게 전쟁은 정치적 당위성의 법리 싸움이지만, 그들은 주인공이 아니다. 실질적 주인공은 현장의 병사들이다. 그들이 없다면, 워-게임(war-game)과 하등 다를 게 없다. 편의성을 이유로 ‘위로부터의 역사’는 애용되지만, ‘백설공주’나 ‘라푼젤’ 모두 독일 전래동화라는 점을 잊지 말자. ‘아래로부터의 역사’도 ‘위의 역사’만큼 중요하다.


독일은 과학력만 세계제일이 아니었나보다. 디즈니 성도 뮌헨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을 차용한걸보면 그는 명예 독일인이라 불렸지 않았을까


병사 시절(혹은 장교 시절), 어떤 지휘관이 제일(第一)의 지휘관이었는지 반추해보길 바란다. 하급자의 심정을 잘 이해하는 상급자가 최고의 지휘관이지 않았는가? 병사의 자기 계발을 보장해주고 휴식 여건을 보장해주는 그런 지휘관을 우리 모두 고대하지 않았는가? 하물며 조교로 뽑힌 병사마저 “숙련된 조교의 시범”으로 증명해 권위를 획득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과 솔선수범의 자세는 지위고하 비물질적 매력의 필요조건이다. 매력의 전파는 곧 강자와 약자의 선호를 동일시한다. 강자의 세계관이 약자의 세계관에 자연히 이식된다. 하급자는 상급자가 원치 않아도 자발적으로 따른다. 그들에 비해 물리적 강압을 수반한 지휘관을 함께 비교해가며 기억해보면 이 사실은 극적이게 와닿을 것이다.


13여단 출신의 이승기. 그의 착실함은 부대인원들의 귀감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했다 확신할지라도, 엄격히 말하면 집단의 구조를 통해 혜택을 입은 것과 동일하다. 지위와 권력을 빌려준 사회에게 묵시적 채무(Obligation)를 진 것이다. 군대를 포함한 부르주아(Bourgeoise)도 쁘띠-부르주아(Petite-Bourgeoise)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러한 책임을 엄숙히 받아들이고 준용해야 한다. 사회가 부여해준 지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은 언제든 채무불이행으로 판정될 소지가 있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위를 향할수록 남을 배려하는 감성을 지니는 것, 그것은 ‘상류층이 되고 싶은 자’들의 기본 소양이다. ‘기회의 공정성’이 중요해진 요즘만큼 편 가르기 할 것 없이 Noblesse Oblige의 마음가짐은 모두가 함양해야 하지 않을까? ‘사촌이 논 사면 부러워서 배 아프다’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그때가 비로소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며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까? 막스 베버가 던진 소신의 삶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오늘의 영화, <닥터 지바고>다.

<닥터 지바고>는 1920년대의 사회주의란 이념 기반의 대중정당과 복고 체제 기반의 간부정당이 윗돌과 아랫돌을 이뤄 곡물을 넣은 뒤, 밀알을 일일이 깨뜨리는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쁘띠-브르주아 지바고의 삶을 담은 영화다. 1914년의 러시아군 참전(參戰)의 광시곡은 곧 개인의 삶에 대한 장송곡이었다. 근대국가의 비이성은 이성적인 개인을 삼켜 맷돌로 함께 뛰어든다. 러시아는 1917년 브레스트-리토포스크 조약으로 휴전에 돌입하지만, 결국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해바라기는 시들고, 그것의 뿌리를 뽑기 위한 낫과 뿌리의 대결만이 남았다. 적백내전의 시작이다.

러시아의 국화인 해바라기. 제정 러시아는 이제 과거의 영광으로 남았다. 이를 뒤로한 채 걸어가는 지바고.

소박하고 자전적인 시 쓰기를 좋아하는 지바고지만, 시가 밥 먹여주지 않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생계를 목적으로 의료인의 삶을 택한다. 현실과의 타협이었지만, 그는 직업의 소명과 쁘띠-브르주아로서 존엄(dignity)을 지키려 노력한다. 1차대전부터 군의관으로 참전한 그는 백색 바탕에 적색 십자가가 있는 완장을 묶고 병상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한다. 그에게는 병원이 곧 전장이었다. 아니, 환자가 있는 곳 어디든 전장이었다. 좀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 그의 임무이자 소명이었다. 반대급부로 그는 명예(dignity)를 얻었다. 돈은 쥐어지지 않지만, 그의 손을 쥔 환자들은 감사를 표했다. 그들은 그에게 ‘시류(時流)’에 올라타라 조언한다. 적군의 시대가 도래했다 경고한다. 한낱 밀알인 개인에겐 ‘시류’는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였다. 모름지기 ‘시류’보다 가족의 행복이 우선이었다.

한편,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연 순간부터 지바고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물보라는 이미 음습하게 그를 감싸고 있다. 과거의 포근한 집은 사라졌다. 절대적인 ‘공동분배’를 이유로 집은 훼손되고 사람들로 가득하다. 볼셰비키 당원과 거주민 위원회 대표자는 권력을 당연시 여긴다. 사유재산은 당연히 공동의 것이라 원용하며 칼부림을 춘다. 기존 체제를 전복(顚覆)해 얻은 권력의 칼이라 희열은 매혹적이며 달콤했다.


권력의 기반인 채무와 책무의 메커니즘은 ‘이념’이란 이유로 짓뭉개 진다. 개인의 권리는 무책임한 권력 앞에 처량하기만 하다. 오직 ‘이념’! ‘이념’만이 삶이요, 진리였다. 정당 강령과 이데올로기만이 폭등한 민중을 대중정당에 묶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편, 그들은 세련되지(cultured) 못했다. 러시아인의 삶은 역사가 죽였다 전도된 자들 앞에서, 지바고의 시는 한낱 땔감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바고는 누군가는 삶을 유지시켜야 한다 통찰한다. 왕실을 해체하는 건 큰 수술임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그에겐 소명과 존엄이 있다. 그에게만은 쁘띠-브르주아로서의 방종(self-indulgence)으로 혁명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 시류는 잔혹했다. 연대책임처럼 집단의 잘못은 개인에게도 이염(Staining)됐다. 이제 지바고네 가족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무고한 시민과 함께 열차에 몸을 실어 바리키노로 향한다.


(2부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belleatriz/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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