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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Mar 21. 2022

니체는 거들뿐, 슈팅은 플라톤이 한다.

목성 갈끄니까~~

정말 미쳤다는 말 밖에 안 나오는 영화다. 68년작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철저한 과학적 고증과 완성도 높은 세트장과 CG 같은 영화 배경은 왜 명작이라 극찬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가장 극적으로 몰입하게 만든 장면은 석판과의 첫 번째 만남에 유인원이 도구의 활용과 경쟁심을 배운 순간이었다. ‘SF 영화에서 웬 뜬금없이 유인원?’이란 의구심을 감독은 한 번의 장면 전환으로 깔끔하게 해소시켰다. 그 직후 우주를 배경으로 삼아 <아름다운 푸른 도나우강>의 연주로 직전의 폭력성을 한 번에 잠재워버린다. 이제 인류는 더 이상 유인원이 아니다. 절제할 수 있는 계몽된 인간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해당 시퀀스와 음악이 합주를 이룬다고 느낀 순간, 더 이상 영화도 뮤직비디오도 아니었다. 그 장소는 현실로 다가왔다.

영화적 감상을 차치하고, "왼손은 거들 뿐"이란 <슬램덩크> 명대사를 오마주한 제목처럼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정치하게 현대에 접목시킨 것이라 분석하고자 한다.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론은 인간은 모두 동굴 벽면을 향해 뒤돌아보지 못한 채 묶여 앉아, 동굴 입구 밖의 물체가 빛에 의해 만들어진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바라보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억압된 상태를 벗어나 인류는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하고, 이는 세계의 진리(idea)를 경험한 철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역설한다. 물론 영화가 니체의 주장을 함축했다는 주장이 주류지만, 이는 개연성이 낮다. 그들은 극 중 주인공이 인간의 세 가지 단계인 낙타, 사자, 어린아이를 모두 겪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석판과의 만남은 각 단계의 시작이고, 영화의 말미에 신인류의 태아로 진화된 주인공은 ‘어린아이’ 단계에 이르렀음을 증명한다. 한낱 인간도 진정한 초월자(위버맨쉬)로 탈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이는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진 분석이라 생각한다. 등비수열과 등차수열은 규칙적이라 원용할 수 있을 뿐,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지금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니체의 저서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세 가지 단계를 제시한 것은 사실이다. 낙타의 우둔함을 먼저 벗어나 사자의 용맹함을 가다듬어 어린아이가 되어라 제언한다. 모든 사슬에서 벗어난 순진무구한 아이의 상태는 진정한 모든 것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이다. 한편, 그의 저서를 좀 더 뜯어보면, 그는 낙타와 사자의 모습을 정치하게 분류하지는 않았다. 오직 초월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제시할 뿐이다.

모든 모순을 다 수용하는 그의 자세는 그가 살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니체가 살던 19세기는 온갖 이념이 혼재하던 시대였다. ‘철륜(鐵輪)의 시대’라 불리던 춘추전국시대만큼 무수한 사상이 부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생존한 이념들은 자유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다.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시작된 자유주의 물결은 모순적이게도 나폴레옹의 권위주의 체제를 배태했다. 마찬가지로 그의 종횡무진은 반작용으로 민족주의를 잉태했다. 민족 단위의 ‘응집성’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을 완성했지만, 동유럽 내 슬라브와 게르만 사이의 민족적 ‘갈등’을 초래했다. 결국 1914년에 이 ‘화약고’는 폭발한다. 가히 민족주의의 태초에 나폴레옹이 있었다.

한편, 1760년부터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은 한 세대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유럽 대륙으로 번졌다. 물질적 혜택 앞에 지위 고하는 없었다. 이전보다 절대적 다수가 더 많은 혜택을 입지만, 반대급부에는 책임이 따랐다. 먹고살고 싶다면 일해야 한다. 설령 3살 배기 유아일지라도 말이다. 아이는 체구가 작기에 좁은 굴뚝에 들어가기 용이했고, 자신의 끼니를 대가를 위해 굴뚝 청소 공으로 일해야 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848년에 세상에 나오며, 극한의 효율성 추구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다. 지식인은 기계의 부품에서 탈피한 인간 사회를 꿈꿨다. 노동자를 위한 신국가가 필요하다. 결국 1917년 군주정과 이별한 러시아는 사회주의 기반의 인류의 두 번째 사회 실험을 시작한다. 사견이지만,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기반한 인류의 첫 번째 사회 실험인 미국과 러시아의 2차 대전 이후 대립은 운명적일 수 있다. 어느 실험이 더 적실성이 높을지 검증의 시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념의 혼재와 시대적 혼란 속에서 니체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그들의 모순을 짚어낸다. 그리고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짜라두짜의 모습을 통해 세상에 제언한다. 니체는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여타 철학자들보다 더 현실적인(실용적인) 직언과 중용을 주장한다. 현실의 모순 속 방향감을 잃지 않게 잘 처신하라 조언한다. 그의 이념을 그릇되게 받아들인 히틀러가 열렬한 신봉자였지만, 엄연히 니체는 반전주의자에 내향적인 사색가였다. 그는 단지 저물어가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에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미래에 대한 내심(內心)의 준비를 조언할 뿐이다. 물론, 철학과 영화의 분석에는 답이 없다. 하나의 그림을 보고도 느끼는 감정은 다양한 바, 나의 주장 또한 타인에게 개연성 낮은 하나의 주장일 수 있다. 다만,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라는 개연성도 인정하는 것 또한 니체의 주장들 중 하나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은 중간의 intermission의 구간으로 두 개의 단막으로 구성된다. 여타 SF 영화와 달리 뮤지컬 형식을 취한다. 1부는 인간의 육안으로 인지할 수 있는 현상 세계를, 2부는 모든 물질은 하나의 형상에서 비롯된 세계가 있다는 이데아(idea)의 세계를 제시한다. 우주를 표류하는 인간의 모습은 존재하는지 불확실한 이데아를 우주 속을 헤엄쳐 찾으러 다니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리고 방황은 태양과 달의 대비를 통해 방향을 제시한다. 태양계의 광원인 태양은 극 중에서 유일하게 그림자가 없는 물체이다. 즉, 이데아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이다. 동시에 인간의 육안으로 어떠한 장치 없이 오롯이 직시하기에는 어려운 대상이다. 너무 부신 빛은 실명에 이르기에 차단막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도적인 연출은 기내 결함으로 승무원이 외부로 나가 수리를 시도할 때, 태양빛이 너무 눈부셔 얼굴을 덮은 유리에 차단막을 가동한 장면에서 돋보인다. 이데아를 직시하기에는 인간은 아직 미숙한 존재다. 아직 그림자로 처리된 표상만을 볼 수밖에 없는 한낱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유인원보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그들과 아직 다를 게 없다.

이에 반해, 광원으로부터 반사된 빛으로만 반짝일 수 있는 달과 행성은 피상을 뜻한다. 우주선의 선두가 태양을 향하는 동안, 극은 잔잔한 클래식과 함께 평온한 느낌을 준다. 끊임없는 태양을 향한, 진리(idea)를 향한 끊임없는 진리 추구는 신과 같던 석판과의 두 번째 조우로 이어진다. 그를 만나러 온 반대급부로 인류의 기술발전을 선물한다. 선물 덕분인지 모른 채, 인류는 기술발전만으로 목성까지 갈 수 있게 됐다 맹신하게 된다. 뱃머리는 더 이상 태양을 바라보지 않는다. 태양에서 보다 더 떨어진 항성과 위성으로만 향한다. 이제 인간은 이데아가 아닌 육체적인 형상만을 종용한다. 이데아에서 멀어질수록 파멸이 그들을 기다린다.

그럼 석판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초현실적 과학의 결정체가 신인 것일까? 아님 신은 죽었고 그곳엔 직사각형 석판의 철저한 과학철학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도한 것일까? 오직 감독만이 알지만, 석판은 인류를 이데아로 이끄는 존재라 생각된다. 1장에서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석판으로 물질은 허상이다는 점을 자각시킨다. 2장에서는 유일한 생존자에게 이데아를 제시해 철인으로 탈각하도록 만든다.

1부에서 석판은 총 2번 등장한다. 각각의 출현은 라플라스의 악마(전지)와 데카르트의 악마(전능)를 상징한다. 이 세계의 인과율을 다 파악한 존재로서 모든 가능세계를 다 예측할 수 있는 라플라스의 악마는 첫 번째의 조우 이후 달에서의 두 번째 조우까지 달의 표면에 박혀 오랫동안 인류를 기다린다. 기술을 발전시켜 그를 다시 만나러 올 때까지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당대 시대 상황을 알면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데탕트가 미처 열리기 직전인 1960년대 말, 미국과 소련은 우주산업 경쟁에 힘쓰던 중이었다. 1958년 러시아의 인공위성 스푸티니크가 최초로 우주궤도에 올라선 이후, 미국은 유인 달 탐사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이 이상 자존심을 갉아버릴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경외의 대상이었던 우주는 국가적 위신 사업으로 개척과 분석의 대상으로 전환됐다. 이를 영화로 투영한다면, 라플라스의 악마가 예측한 대로 미국은 그를 만나기 위해(?) 열심히 우주산업을 활성화시킨 것과 다름없다. 분명 당시의 관객들은 나자빠졌을 것이다. 우리가 원해서 시작한 사업이 사실 석판을 만나기 위한 것이라니! 유인원은 동굴 속에 감금된 존재라 생각하고, 철저한 이성과 논리를 통해 계몽(enlightened) 했다 자신만만한 현대인이지만, 결국 그들도 아직 횃불 든 유인원인 것이다.

두 번째 조우 이후, 석판은 전능한 존재(데카르트의 악마)로 변신한다. 우리가 인지한 진실이 사실은 진실이 아니라, 전능한 존재에 의해 조작당해 거짓을 진실이라 여기게 만드는 데카르트의 악마는 절대로 오차를 일으킬 수 없는 컴퓨터에 오류가 발생시킨다. 기실 숫자란 논리의 공리와 같아 절대불변의 사실이라 취급된다. 그렇기에 영화 내 슈퍼컴퓨터인 HAL 9000은 모든 가능성을 다 포섭해 (인간이 창조한) 전능한 존재로 등장한다. 자신은 오차가 존재할 수 없으며, 설령 존재할지라도 그건 인간이 만든 오류로 인한 것이라 극 중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의 명시성은 데카르트의 악마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완전무결의 인공지능이지만, 악마의 전능한 힘으로 거짓이 진실로 바뀐 순간, 기계는 오류를 범한다. 프로그래밍으로 내재된 오류의 근원지가 인간이라 오판하여 정비공 한 명을 제외한 채 모두 죽인다.

두 악마와 양립할 수 있는 존재는 신만이 유일하다. 감독은 석판을 신과 같은 존재로 격상해 이데아에서 온 어떠한 것(it)이라 암시하며 1 막을 끝맺는다.

2 막은 1 막보다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다. 이제 이데아로 진입하는 것만 남겼기 때문이다. 마치 마약을 투여해 환각상태에 빠진 것처럼. 배경은 유지한 채 형형색색의 변주는 주인공의 눈이 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급진적인 장면의 구성에 의구심을 가지게 만드는 이 방법은 기실 우리도 이 영화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이끌어낸다. 우리의 눈도 마찬가지로 멀고 있음을 깨닫게 될 즈음 새로운 장소로 나타난다. 우주 공간이 아닌, 아늑한 방이 있는 이곳. 여기는 이데아다. 수리공과 우리는 긴 동굴의 터널을 지나 이데아를 만끽하러 왔다. 그곳에는 모든 표상의 근원인 오직 한 남자만이 존재한다. 그가 누구인지 명시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필경 그는 신일 것이다. 그리고 수리공과 관객은 그와의 조우를 통해 철인으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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