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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Mar 21. 2022

레옹과 마틸다, 그리고 예수와 막달레나

신기루같은 그들의 인연

Sting - Shape of My Heart (Leon)

“Changing ain’t good Leon. You know?”. 브로커인 이탈리아 요릿집 사장의 대사는 히트맨인 리옹에게 이중적으로 다가온다. 그와의 소싯적 첫 만남 이후, 나이가 들지라도 변함없이 있어라는 강제의 의미와, 암살 업무를 일관되게 수행하라는 종용의 의미로 말이다. 전자의 의미가 그를 구속시킨 것일까? 아님 그 반대일까? 중년의 나이가 된 레옹은 ‘불사조’라는 별명에 걸맞게 청부 살인 실력은 빼어나지만, 문맹에 술보다 우유 마시기를 선호한다. 소싯적 사랑하던 그의 마돈나(Madonna)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죽은 충격. 복수심에 불타 첫 살인을 저지른 충격. 충격들에 쫓기듯 미국으로 몸을 실었다. 그 사건 이후 그의 시간은 멈춰 있다. 그리고 어린 소녀 마틸다를 만나 시계는 재가동된다.

자신에게도 아직 순정이 남아있다 믿는 것일까? 히트맨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때는 소소한 생활을 영위한다. 어릴 적에 본 ‘언제나 맑음’을 오래된 영화관에서 관람하거나 일과처럼 미리암(Miriam) Grocery에서 우유를 사 집으로 향한다. 미리암, 마리아, 그리고 마돈나가 모두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점을 미뤄보아, 젊은 시절의 유일한 마돈나를 잃은 공백감을 미리암에서 찾았으리라. 주일에 성당을 찾아 성모 마리아와 주님께 예배드리듯, 레옹은 식료품점에서 우유를 삼으로써 마돈나에게 다가간다. 이런 사소하고 수수한 일상의 반복만이 그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기쁨도 잠시, 레옹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한다. 죄를 사해 달라 기도 올리듯 말이다. 다음은 방 정리다. 깔끔하게 방을 정돈하며 금욕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 그리고 의자에 걸터앉아 선글라스를 낀 뒤 매일 밤 잠 못 이루며 참회한다. 오롯이 잠을 자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결국 마틸다를 통해 이뤄진다.

18살 갓 성인이 된 여성으로 보기엔 미처 젖살이 남아있는 마틸다로 인해 중년의 레옹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건 자칫 원조교제를 정당화하는 영화처럼 해석될 수도 있다. 소녀답지 않은 마틸다의 이지적인 눈빛과 대범하게 유혹하는 장면은 보는 이들마저 빠져들게 만든다.

 그녀는 끊임없이 레옹을(그리고 관객을) 유혹한다. 미성숙해서 그런지, 능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녀의 육체적인 구애는 더 강렬하고 적나라하게 다가온다. (실제로 이 영화로 데뷔한 13살의 나탈리 포트먼은 성적 판타지를 묘사한 팬레터를 받는 정신적 충격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레옹>은 레옹과 마틸다의 관계를 예수와 막달레나의 관계로 비췄다. 앞서 말한 Miriam Grocery와 인물 맞추기 게임의 마돈나, 그리고 영화 종반부의 성모(聖母) 마리아 상(像)의 등장은 둘의 관계를 후자로 판단될 여지를 관객에게 유보한다. 열렬한 신봉자와 아이콘(icon)의 관계에서 때로는 소녀 대 소년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둘의 관계는 다각화한다.


마찬가지로, 영화 중반부 마틸다가 가명으로 호텔에 등록한 ‘맥거핀’이 등장하며 둘의 애정관계에 대해 사회적 기준을 대는 것은 무의미한 점을 암시한다. 맥거핀의 사전적 의미는 영화 줄거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감독이 의도적으로 중요한 것처럼 위장해 영사하는 기법이다. 작중 주요 인물들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정작 관객들이 궁금해하는 것이다. <레옹>은 마틸다와 레옹 둘만의 이야기이다. 치기 어린 마음에 그녀가 호텔에서 둘의 관계는 부녀관계가 아닌 연인 관계라 언급한 부분은 일정 부분 호텔리어뿐만 아니라 관객을 향해 도발한 것이다. 결국 분기탱천한 호텔 직원들이 관객을 대신해 그들을 쫓아낸다.

보수적인 관객이라면 그 장면을 보고 십분 동의했으리라. (동시에 "역시 프랑스 영화다"란 생각도 들 것이다) 불안정한 가정에서 지낸 마틸다가 생전에 처음 본 정상적인 성인이기에, 그를 열렬히 따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 그럴 수도 있지만, <롤리타>의 소녀처럼 단지 성적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어머니와 사별하고 아버지를 따라 새로운 가정에 편입됐기에 처음으로 친절함을 느끼게 해준 레옹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꼈을 개연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의 연인 관계 여부는 쟁점이라 볼 수 없다. 성경에서도 명시적으로 예수와 막달레나의 관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연인 관계였는지 아닌지는 오직 종파 별 신자와 학자들의 해석만이 분분하다.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 중 언제나 첫자리에는 막달레나가 있었고, 예수의 부활과 재림의 순간을 처음으로 목도한 존재도 그녀였다.

마찬가지로, 레옹의 옆자리에는 항상 마틸다가 있고, ‘임종’을 고한 것 같던 그의 시간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가며 ‘재(再)-활성’화 순간을 처음 목도한 존재도 마틸다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종파의 해석 상으로 그 둘의 관계가 다양하게 비칠 수 있듯, 우리가 ‘각별한’ 둘의 관계를 연인 관계로 정의하는 것도 개연성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지탄받을 여지가 존재하는 바, 그들을 위해 레옹을 <롤리타>의 험버트 교수와 <타짜>의 곽철용과 대비시켜 생각해 보는 건 어떨지 제언한다. 레옹은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인 독해와 작문법조차 못 배운 채, 자신의 시계가 멈춰 있는 그 시절을 향해 예배한다. 그리고 마틸다를 통해 그 고난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확인한다. 다시는 침대에서 잘 수 없으리라 믿고 변화는 좋지 않은 것이라 믿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레옹은 이 진실을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을 때 비로소 자각한다. 그는 마돈나에게 작별을 고할 의지가 생겼고, 마틸다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막달레나’의 마틸다지만, ‘마돈나’이고 싶은 끊임없던 시도는 무위인 걸 깨닫는다. 90년대 디바(Diva)인 ‘마돈나’처럼 불리길 원해 옷을 입던 시도와 성인 여성처럼 월경(月經)을 시작한 점을 알리며 육체적 관계를 종용한 시도들 말이다. 그녀도 레옹이 그녀를 ‘마돈나’로 바라본다는 것을 인지한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결코 이뤄질 수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도 가문 간 불화(不和)인 외적인 요소로 시작됐다. 둘의 관계가 호텔리어에게 누설(?) 된 것은 (혹은 관객에게 발각된 것은) 둘의 관계는 비극으로 끝날 것을 암시한다.

한편, 교수인 험버트는 히트맨인 레옹과 정반대의 삶을 살지만, 인격적으로 그보다 미숙하다. 험버트는 로리타의 내적 고민이나 괴로움에 대한 반추 없이 12살의 소녀를 찬양한다. 오직 ‘살의 젊음’에 대한 찬미만 이뤄질 뿐이다. 행동발달 상으로 미성숙한 유아가 성인을 따라 하거나 선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셈이다. 넘쳐흐르는 자신의 육욕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를 돌이켜보지 못한다.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동일하다. 짬짜면이든 짜짬면이든 모두 동일한 비빔면이듯, 서순만 다를 뿐이다. 인생은 다르다. 살아가는 대로 합리화하며 지내온 험버트 교수와 반추하며 살아온 레옹의 ‘한 끗 차이’는 완전히 다른 결과로 인도한다. 험버트 교수는 성범죄자로 낙인찍혔지만, 레옹은 마틸다를 위해 희생할 용기를 가진다.

<타짜> 中

마찬가지로, 곽철용도 순정이 있었다. 적금 붓고 보험 들고 살지만, 순정이 짓밟혔다 느낀 순간 화란이에게 깡패로 돌변한다. 그와 달리 레옹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아직 순정이 있는지 회의(懷疑) 한다. 최소한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除) 하고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요소는 레스토랑 주인이 관리한다. (그가 자립할 순간까지 이자없는 '은행'처럼 맡아놓는다고 볼 수도 있다) 마틸다를 집으로 들인 후, 소년 레옹은 더 이상 여기 없는 걸 깨닫는다. 방을 정돈하거나 빨랫감을 다리며 자신의 순정을 확인했지만, 그녀가 집에 들여준 대가로 집안일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중년의 아저씨일 뿐이다. 그렇지만, 곽철용과 달리 그녀를 겁탈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소년의 상실감을 그녀에게 물리적 폭력으로 해소하지 않는다. 그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 그만큼 자기 객관화가 철저히 참회를 통해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순정은 루비콘 강을 건넜다 생각했지만, 영화의 종반부로 향할수록 아직 곁에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레옹과 마틸다는 상보 관계였다. 둘은 영화 내내 등장하던 화분 속의 화초처럼 이리저리 부유하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런 삶 덕분에 둘은 만날 수 있었다. 레옹은 그가 알고 있는 전부를 가르쳤고, 마틸다도 마찬가지였다. 의지했기에 그 둘은 완성됐다.

종국적으로 둘은 다른 세계에 정착하지만, 모두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며 살 수 있게 된다. 참회만이 삶의 목표였던 레옹은 마틸다를 살려 보낸다는 최초의 현실적 목표를 달성하며 죽음에 정착한다. 반면, 마틸다는 본인이 사망했다고 거짓말한 학교로 돌아가 새로운 환경에 정착한다. 그렇다고 레옹을 잊는다는 절대 아니다. 그의 또 다른 동반자였던 화초를 직접 땅에 심어 그녀와 함께 성장하길 바라며 영화는 마무리한다. 비록 비극일지라도 그 둘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로 거듭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정상적인 삶을 영위했다면, 둘은 만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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