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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Mar 23. 2022

할리우드 말고, 아메리카

원조란 타이틀에는 역사가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이란 문구만 보면 이젠 할리우드가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1960년대 할리우드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그려내 '그 시절'의 분위기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런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비슷한 제목의 영화가 이미 나와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그것도 1984년에 말이다.


잠시 뜬금없지만 국민첫사랑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자. 8090을 지나온 분들이라면 '국민 첫사랑'은 강수지가 생각날 것이다. 김완선과는 다른 매력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흔들었으리. 2000년대를 지나온 이들에겐 전지현과 손예진이, 2010년대를 지나온 이들에겐 배수지가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이런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존재했다.

걸크러쉬 vs 청순의 논쟁은 오늘날 아이돌시장에서도 끊임없다.

이 영화에도 미국의 국민첫사랑이 존재한다. 데뷔작이지만 첫 등장만으로 미국의 '국민첫사랑'으로 등극한다. 그만큼 시대를 아우르는 매력을 그녀가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않을까?  어린 시절의 데보라 역을 맡은 제니퍼 코넬리가 나오는 오늘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다.

이 장면으로 제니퍼 코넬리는 국민첫사랑으로 등극한다.

“옛날 옛적에…”라는 문장을 보면 대게 전래동화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해님달님 혹은 금도끼 은도끼처럼 가상의 인물을 통한 허구의 이야기지만, 이야기는 과거에 존재한 사건이라 가정한 채 진행된다. 그리고 결말은 행복하고 악한자는 벌 받는다. 구전 문학을 차치하고, “나 때는 말이야~” 라던가 “왕년에 말이야~”의 본인의 경험담도 마찬가지다. 차이점이라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가 투영된다.



아무리 주관성을 배제한다 할지라도 직접 피부로 겪은 이야기라 객관성만이 존재할 수 없다. 경험담은 그 순간에 대한 화자의 그리움이나 아쉬움이 도처에 배어 있다. 내심(內心)의 상태는 곧장 머릿속의 편집장에게 일감을 맡기고 감정의 일렁임은 극적이게 각색된다. 과오(過誤)를 범할지라도 그 순간이 행복했다면 기억은 희극으로 편집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내가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말이야’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주관이 담긴 생각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건 단지 또 다른 주관성으로 분석한다는 뜻이지 않을까? 렌즈의 종류를 무궁무진하게 보유할지라도 보편성을 획득하지 객관성을 내재하진 않는다.


전래동화처럼 보이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주인공을 소품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전래동화와 달리 주인공과 화자는 동일시된다. 그렇다. 영화는 경험담으로 격상한다. 심지어 실화라는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당시 영화산업이 부흥하며 할리우드 영화는 상업화되고 정형화됐다. 목표는 빠른 시장점유였다. 러닝타임은 90분 내외로 맞춰졌고, 선과 악의 명확한 인물 대비로 ‘사이다 식’ (권선징악 식) 플롯 구성이 주류를 이뤘다. 뿐만 아니라, 뇌쇄적인 인물의 등장으로 관객의 이목을 끌고자 노력했다. 영화는 관객에게 사유의 장(場)이 아닌, 엔터테인먼트의 장으로 전환됐다.

어벤저스 vs 타노스, 선악의 명확한 대립은 지금도 애용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선한 면과 악한 면이 인물들 모두에게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한 인물을 절대선(善)과 절대 악(惡)으로 결론 내리는 건 너무 성급하다. 공이 크면 과도 크듯, 선함과 악함은 상보적이다. 종교 창시자가 아닌 한, 인류사에서 티 없이 선한 사람으로 지칭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미 사춘기 시절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경험이 있는 우린 선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또한, “심연을 너무 깊게 들여다보면, 심연도 너를 쳐다본다”는 니체의 말처럼, 우리도 알게 모르게 선함과 악함이 혼재된 상태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혼재된 상태가 진정으로 ‘순수’ 한 상태이고, 우린 단지 ‘시대적 상황’에 맞춰 정돈돼 가는 존재이지 않을까? 시대의 수인(囚人)이 되기 이전의 그 상태 말이다. 이제 한 집단의 삶을 엿보게 해주는 이 영화는 4시간 10분의 러닝타임이 부족하다 느껴진다. 반전만이 존재할 뿐, 사이다식 전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광고를 기점으로 사이다와 고구마라는 밈(meme)이 많이 나왔던걸 기억한다.


<옛날 옛적 미국에서>라 직역되듯, 영화는 무-질서적인 1910년대 미국 사회가 점차 정돈되어가는 과정을 누들스의 시선으로 담은 영화다.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과거에 존재”했던 것만 같은” 사람들 간의 느슨한 연대감에 심심(深心)한 위로를 전한다. 황량하지만 이민자로 넘쳐 무질서했던 뉴욕 시나고그(유대인 집단 거주소) 지만 세월이 흐르며 도시는 정리된다. 빌딩도 점점 높아져만 간다. 한 때 사회적 소수자들이 모여 운영되던 역내 서커스 입구는 어느새 뉴욕을 상징하는 빅애플(Big Apple)로 향하는 문으로 치환된다. 경제적 성공을 이룬 상태를 상징하는 그 “빅애플”말이다.


시간이란 x축 위의 뉴욕의 스카이라인은 y축 방향으로 하염없이 솟아 나간다. 상승곡선과 달리 경험담 속 등장인물들의 인간성은 하나 둘 정돈돼 가고 있다. 영화는 이를 구슬프게 조망한다. 사랑하던 데보라도, 젊음을 함께한 맥스와 뚱보도, 범행 현장에서 만난 캐럴도 모두 각자의 선택을 내린다. 그리고 스스로 타협한다. ‘그래 그때 난 어쩔 수 없었어’ 라 읊조린다. 나이와 명예를 이유로, 배신을 이유로, 가업을 이유로, 돈을 이유로 말이다.


그들에 비해 누들스는 미련해 보일 수도 있다. 10년을 도망치듯 밀고한 사실에 속죄하며 살다 맥스의 계략에 연루(entrapped)되니 말이다. 맥스는 결국 분쇄기 속으로 스스로 걸어가 죽는다. 한편, 최소한의 인간성만을 지키고자 한 누들스의 말로(末路)는 모든 것을 빼앗겨 비참해 보일지라도 떳떳해 보인다. 제일 그릇된 삶을 살아온 맥스부터 “그나마” 떳떳하게 삶을 영위하려 한 누들스까지, 인간군상(群像)의 스펙트럼은 분광기를 통해 방출된다.

빛이 스펙트럼을 통과해 방출되듯, 군상의 스펙트럼은 그럼 무엇일까? 바로 시대별 상황이다. 혼재된 ‘순수’의 상태에는 당연히 명암이 혼재한다. 오직 스펙트럼만이 정치(政治)하게 분류해준다. 춥고 배고프던 ‘그 시절’의 뉴욕 거리는 엔니오 모리꼬네가 만든 배경음악 “Poverty”와 함께 그 정취가 극대화된다. 그들은 물질적으로만 궁핍했을 뿐, 삶은 고달프지 않았다. 돈이 중요하긴 했지만, 아직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돈은 단지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해주는 수단일 뿐이다. 보헤미안 집시들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 시절’ 아이들은 오늘만을 바라보며 살았기에 오늘날의 아이들보다 더 ‘순수’했을지도 모른다. 스펙트럼을 만들 ‘보편적’ 렌즈는 일회용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일회용 렌즈. 재사용하면 패혈증까지 일어날 수 있다.

‘그 시절’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관용할 수 있는 윈셋(Winset)은 넓은 것처럼 묘사된다. 한 끼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던 시대였다. 케이크 한 조각만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온 세상을 다 가질 것만 같던 시대였다. 안전지대도 미처 규정되지 않았고, 위법행위에 대한 처벌도 제대로 제정되지 못했지만, 소년들은 어디든 쏘다닐 수 있었고, 약간의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또한, 처음 만난 사이라도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타민족에게 배타적인 유대인이지만, 비-유대인이었던 맥스는 첫눈에 누들스와 친구가 됐다. 둘은 서로의 삼촌이 되었다. 가히 상호 간의 유대가 미처 끊기기 전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런 끈끈한 유대감을 기반했기에 거칠게 표현되던 개인의 의견마저 거리낌 없이 수용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처 ‘구별짓기’가 달성되기 전이라 사회가 수용력을 함양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내가 뭘 하든 남 신경 안 쓰고 사는 ‘적극적 자유주의자’ (우린 이를 가리켜 이기주의자라 한다) 마저 용인해줄 수 있던 ‘그 시절’의 사회였다. 설령 그것이 방화, 절도, 성관계라도 말이다.


당연히 매춘과 강간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감독도 마찬가지로 이 두 행위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비춘다. 감독은 여성들의 눈을 클로즈업한다. 누들스와 친구들의 서슴없는 성적인 접근에 그녀들의 감정은 눈을 통해 전달한다. 특히 페기와 데보라의 시선으로 그 불쾌한 감정은 극대화된다. 한편, 누들스와 친구들은 이런 시선을 인지하지 못한다. 아니, 누들스가 범행 도중 되려 흥분한 캐럴의 모습이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인식한다. 페기의 불쾌한 감정 담긴 시선이 과거에 한 번 클로즈업으로 보였음에도 말이다. (어릴 적 성교육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캐럴을 아지트에서 다시 만나는 장면. 데보라와의 갈등의 단초가 된다.

페기와의 첫 정사는 금전관계의 매춘이었고, 캐럴과의 두 번째 정사는 성폭행이었다. 매춘이나 마조히즘에 절여진 여자나 누들스에겐 그녀들이 원했기에 행동한 것처럼 보인다. 그릇된 성 인식 때문이었을까, 아님 제대로 된 성교육을 못 받은 것이 원인이었을까? 데보라를 ‘순결’의 상징인 백합이라 묘사한 누들스는 그 꽃을 꺾어버린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다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말이다.

미세한 차이만 존재하던 '그 시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처음에는 똑같이 움직이던 막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제각기 미세한 차이를 만든다. 너무나 미세해 이를 확인할 수 없지만, 어느새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만큼 초기 조건이 달라지면 그 결괏값은 천차만별이다. 혼탁한 ‘순수’의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 해진다. 무엇이든 될 수 있던 무질서의 어린 시절에서 질서의 상태로 정착한다. 중년배우가 된 데보라와의 4번째 만남만을 제하더라도 누들스에겐 3번의 기회가 있었다. 데보라와 동일한 진폭에 맞춰질 기회 말이다.


하지만, 번번이 맥스가 훼방을 놓는다. 비록 3번째는 과오가 있지만 속죄하며 빈다면 돌이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들스는 기차만 하염없이 쳐다본다. 결국 누들스의 삶의 진폭은 데보라가 아닌, 친구들에게 반강제적으로 맞춰진다.

기계론적 인과관계로 누들스의 기구한 삶의 원인은 맥스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이다. 상호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모든 사건이 마치 독립되어 보이지만, 서로 얽혀 있다. 전체와 부분 뒤엉켜 파악조차 할 수 없다. 이 매듭을 푸는 방법은 오직 하나이다. 실타래를 단칼에 잘라내는 것. 그것이 유일(有一)의 해법이다.

‘순수’했던 그 시절을 벗어나, 사회를 함양하는 렌즈는 더 이상 일회용이 아니다. 물질적 풍요로움은 생각의 다양성을 배태했다. 절대적 교육의 보급과 퀄리티의 향상, 그리고 경제적 풍요로움은 렌즈를 육안에 삽입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시대는 누들스가 곱씹던 ‘그 시절’의 여운을 강제로 끝낸다. 그들이 한때 헤엄치던 순수한 바다는 이제 환경오염으로 더럽혀진다. 순수했던 그들도 방화, 밀주, 살인, 그릇된 성 인식으로 더럽혀진다. 이제 ‘그 시절’의 바다는 오직 액자로만 볼 수 있다. 바다는 광란의 파티 속 여자와 술만 가득한 장소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아직 발은 담글 수 있다. 최후의 보루가 남았기 때문이다. 바로 돈 앞에서의 최소한의 양심이다.

‘그 시절’, 맥스의 주도 하에 합심해서 번 돈은 무조건 나눠 가지는 대원칙을 세운다. 한 명이 쉬거나 위법행위를 저지르더라도 집단 간 연대의식으로 집단의 의사결정을 보완했다. 각자의 이익은 대원칙 하에서만 용인됐다. 덕분에 돈 앞에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킬 수 있었다. 연대의식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었다. 조화로워 보이는 의사결정 과정이지만 비합리적 집단의 의결과정이다. 집단사고(Groupthink)의 한계는 결국 굴절률 높은 스펙트럼 앞에서 무색해진다. 맥스가 연방은행을 털기로 결정한 순간, 가격은 매겨졌다. 이제 가치와 이념은 퇴색됐다. 그들의 추억은 전부 돈으로 책정됐다.

'순수'했던 그 시절. 그들은 점차 돈의 맛을 알아간다.

일말의 연대의식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누들스는 경찰에 밀고하지만, 이마저 맥스는 코웃음 치며 그를 죄의식에 빠뜨린다. 오직 돈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거기엔 본인도 포함됐다. 그리고 누들스가 살았어야 할 삶을 대신 영위한다. 그가 사랑한 데보라와 결혼하고 슬하에 자녀도 남기며 장관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는 위기에 처해 누들스에게 일말의 복수 기회를 준다며 최후의 순간에 부른다. 마치 기회를 하사하겠다는 듯 말이다. 호의호식(好衣好食)한 삶을 살며 끝까지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순수’를 간직한 누들스는 자기가 알던 ‘맥스’는 죽었다 고한다. 결국 맥스는 분쇄기로 홀로 걸어간다. 일말의 인간성을 잃은 채 살아온 자 다운 결말이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것은 부의 상징과도 같았다. 깔끔하게 정돈되고 다른 이들에게 방해받지 않도록 보장된 공간 아파트. 그곳은 정말 꿈에 그린 공간이었다. 한편, 한 손에 두 가지를 동시에 쥘 수 없듯, 물질적 편안함을 보장받는 대가로 그 시절에 대한 느슨한 연대감과 ‘순수’는 사라졌다. ‘순수’ 속 악함만 바라보진 마시라. 괜히 2010년대 후반, ‘응답하라 1988’ 신드롬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시절에는 사촌보다 이웃사촌이 더 각별한 사이였고, 이웃들 간에 ‘정(情)’은 있었다. 연대의식이 존재했다. 그 시절을 살진 못했지만 정겹고 살아보고 싶다고 아쉬워한 시청자들의 평은 그 시절의 ‘순수’를 그리워하는 걸 반증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적어도 돈보다는 더 ‘순수’했던 가치가 있던 걸 우린 삶에 치여 잊고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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