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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Apr 09. 2022

어머니, 정녕 저를 믿으셔야 합니까? Part.1

춘매추국각유시(春梅秋菊各有時)

(앞의 Part.0를 읽고 보시면, 더 풍부한 감상을 하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belleatriz/12


4세대 아이돌 그룹 에스파(aespa). AI기술 발전에 발맞춰 사이버-펑크(Cyber-Punk)를 테마로 내세운 그들이지만, 독창성보다는 기존 세계관의 재구축에 가깝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1부 글이 늦어졌습니다. 제 글을 기다려주신 분들에게 심심(深心)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당분간 주 1회 내지 2회로 찾아뵐듯 합니다. 행여나 만족스럽지 못한 글일지라도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십사 1부 진행하겠습니다. 미숙한 제 글을 찾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들어진 노블(Noble)한 전통 속에서 압축적인 교육만 이뤄지는 이 학교. 만들어진 전통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수업은 ‘수험 최적화’ 돼 있다. 수업시간당 단어량을 극대화하거나 진도량의 극대화를 위해 어근(語根)의 역사와 과학 실험은 생략된다. 무엇을 위한 아웃소싱인지 모르지만, 앙상한 뼈대만 남은 수업들은 학생의 수업 의지를 저하시킨다. 하물며 존 키팅 교수가 담당할 문학 수업의 주(主) 교과서에는 작품의 우열을 계량적인 방법으로 판별하라 제언한다. 대중적으로 명작이라 평가되는 작품일수록, 방사선의 우상단에 위치하며, 문학적 가치가 떨어질수록 좌하단에 위치시키도록 말이다.



당연하지만, 이는 그릇된 접근방식이다. 故 이어령 교수님이 말씀하듯, 문학의 정답은 5지선다 밖에 존재한다. 주어진 틀 속에서 문학의 정답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창발 하는 생각의 다양성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교과서의 문학작품 해설과 시인의 의도가 불일치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렇다면 올바른 대중적 해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실제 예시를 한 가지 들자면. 만약 저 교과서의 방법으로 문학이 절대적으로 분석된다면, 오늘날 SF의 수작이자, 사이버-펑크(Cyber-punk) 장르의 시초라고 평가되는 <블레이드 러너>는 시장논리에 따라 소각돼야 할 영화이다.


사이버펑크의 시초와 다름없는 <블레이드러너>. 일본의 네온사인을 활용한 분위기는 오늘날 서구권이 바라보는 일본 이미지를 구축하게 만들어줬다.

당대 유수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쓰레기(rubbish)라 평했다. 심지어 영화 주연배우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마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빼고 싶다 토로했다. 이 정도로 천대받은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이제 시대의 주인공은 바뀐다. (그래프의 이론에 따르면) <블레이드 러너>는 좌하단 끝자락에서 우상단 끝으로 이동한다.



영화광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탄 덕분에 <블레이드 러너>는 명작의 반열에 등극한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논쟁 중인 ‘로봇공학의 3원칙’에서 벗어난 개체를 인간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선각자(先覺者)처럼 조언하니 말이다. (영화에서는 ‘돌아온 탕아’를 언급하며 묵시적으로 감독의 생각을 전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무수한 게임과 영화, 심지어 한국 아이돌 산업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이다. 우린 인지하지 못할 뿐, 영화가 구축한 세계 속을 거닐고 있는 중이다.


사이버펑크를 배경으로 한 청하의 무대


계량적인 x축과 y축의 공식에 교조화 됐다면, <블레이드 러너>는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Panta Rhei라는 말처럼, 만물은 유전(流轉)한다. 시대의 빛을 발하지 못하더라도, 후세의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작품들은 부지기수(不知其數)다. 노블함을 추구하는 학교에서 공식에 전도돼 시대에 빛을 받지 못한 작품은 하등 쓸모없다고 교육받으면, 과연 사회 계층의 리더가 된 그 아이들의 구축할 사회의 생각 틀은 어떻게 구축돼 있을까? 아마 데카르트처럼 좌표 상의 파리들을 눈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기울기를 저울질하느라 바쁠 것이다.



존 키팅 교수가 이런 의도를 참작해 수업을 진행했지는 모르지만, 그의 교육방식은 사뭇 다르다(Extra-ordinary). 기존(Ordinary)의 수업들과는 다르게 그는 학생들의 다양한 시각을 획일화하지 않는다. 참고로 한국과 달리 서방권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다(ordinary)라 불리는 걸 부끄럽게 여긴다. 표준적(Ordianry)이란 무색무취 (無色無臭)의 인간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비상함(Extra-Ordinary)이 최고의 찬사들 중 하나인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명시적인 특징이 내재돼 있음에 경의(敬意)를 표하는 것이니 말이다.

 

시를 외치고(!) 공차기를 진행하는 문학수업. 기존의 틀을 깨는 수업 방식이다.

아무리 조악(粗惡) 해 보일지라도, 그는 학생들의 가능성을 바라봤다. 모든 고등교육에는 춤이 편성돼야 하듯. 그의 수업은 신체를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진행된다. 교탁을 밟고 올라가 관점의 다양성을 알려주는 것부터 시작해, 개인의 약점을 주제로 손을 춤추듯 움직여 만든 자작(自作)한 시(詩)를 발로 공을 차며 낭독하도록 한다. 마치 약점들은 다 날려버리라는 듯 말이다. 일변도(一邊倒)로 내달리던 아이들에게 중용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을 깨우쳐준다.




자넬 비웃는 것이 아니라 자네와 함께 비웃었어. 주제가 간단하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때론 가장 아름다운 시(詩)란 단순한 주제에 관한 것일 수 있으니까, 고양이나 꽃 아니면 비 같은 걸로, 시는 계시를 지니고 어디서나 우러나오지. 평범하게는 쓰지 마라.


We are not laughing at you; we are laughing near you. I don’t mind that your poem has a simple theme. Sometimes most beautiful poetry can be simple things like a cat or flower or rain. You see poetry can be from many things with stuffs from revelation in it. Just don’t let your poems be ordinary.




물론 일방향적인 수업이었다면, 한 교사의 미친 행위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특히 표준적(Ordinary)한 교육방식이 노블함과 다름없다 고착화된 학교에서는 더욱이 말이다. 교사의 의지는 곧 학생의 마음에 불을 지핀다. 키팅 교수가 학창 시절 속한 죽인 시인 동아리 회(Dead Poet Society)를 7명의 학생들이 모여 잊혀진 전통을 다시 부활시킨다. 아이들만의 문화의 장은 다시 태동한다.

19세기만 하더라도 곰팡대는 지식인과 부유층의 상징이었다.

단번에 길을 찾아낸다면, 학생이 아닌 법. 초기에는 말초적인 이야기들만 오가지만,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 곰팡대를 물고 사유하기 시작한다. 마치 근현대의 지식인들처럼 말이다. 하나 둘 자기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깨달으며 그들의 정신은 성숙해진다. 예술에 대한 꿈을 키우며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올 준비를 한다. Carpe Diem. 오늘 이 순간을 잡기 위해(Siese the day) 아이들은 뛰쳐나간다.




연극을 해볼 거야! 그래! 그래! 난 배우가 될 거야! 지난여름 오디션에도 나가려 했는데 아버지가 반대했어. 내 인생 처음으로, 난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알아냈어. 그리고 처음으로 아버지가 찬성하든 말든 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거야. Carpe Diem!


I’m gonna act. Yes. Yes. I’m gonna be an actor. Ever since I can remember, I wanted to try this. I’ve even tried to go to Summer Audition the last year, but of course, my father wouldn’t let me. For the first time in my whole life, I know what I wanna… For the first time, I wanna do it! Whether my father wants me to do it or not. Carpe Diem!




물론 미숙한 아이들은 “Seise the day”를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오늘을 붙잡아”라는 말이 마치 “오늘만 생각하며 살아라”라고 착각되듯 말이다. (몇 년 전 한국의 상업화된 YOLO(You Only Live Once) 열풍이 분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이들은 어느새 서슴없이 음주가무를 즐기고, 학교 교직원들을 골탕 먹이기까지 한다. 여기서 키팅 교수의 진가는 다시 나타난다. 사려 깊음(Prudence)이 단순히 배려심이 넘친다는 뜻 외에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전수한다. 지켜야 할 ‘선’을 인지하며 행동하는 것. 그것이 Carpe Diem의 정수였다.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라는 것은 장난치라는 말이 아니다. 대담할 시간과 조심할 시간은 따로 있는 법이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일수록 이걸 잘 알지. 대담한 자와 미련한 자는 다르다.


Sucking the marrow of life does not mean choking on the bone. There is time for daring and time for caution. And the wiseman understands which is called for. Daring and stupid are different.



닐의 죽음에 슬퍼하는 아이들. 한 겨울 어느날 닐은 싸늘한 주검으로 아버지의 서고에서 발견된다.

안타깝게도, 예상과 달리 결말은 행복하지 않다. 아니, SKY캐슬의 1화의 오리지널(original) 버전이라 말할 수 있겠다. “Seise the day”로 연기에 재능을 발견한 닐이지만, 그의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Seise the day after”일뿐이다. 먹고살기 위해 오늘을 붙잡는 건 사치라며 말이다. 닐은 열연(熱演)했지만, 아버지에게는 의대로 향하는 길에 방해 요소일 뿐이다. 더 엄격한 사관학교로 닐을 전학시키기로 결정한 눈 오는 그날 밤. 붉은 양귀비는 피어났다.




수학, 영어 위주의 무간지옥 덕분에(?) 우린 자연주의 철학에 따라 서구식 마인드로 모든 걸 계량화할 능력이 생겼다. 생체리듬 속 체화된 계량 방법은 우리의 삶을 정형화시키는 중이다. 게임의 민족, 배달의 민족, 수험의 민족, 반도체 강국, 아이돌 산업.. 제한시간 속 결과와 수익성을 극대화해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인 양 함축됐다. 어쩌면 우린 아담 스미스(Adam Smith) 형() 특화 민족으로 바뀐 게 아닐까?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누가 강남 가자고 한지도 모른 채 일단 (심지어 강남 맞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어딘가로 내달려 온 대한민국이다. 하물며 '보편적' 특화선 상에 위치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다 이상하게 여기는 것 또한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수험과 속도의 민족이 아닌, 특화의 민족인 것 같다.

구한말까지만 하더라도 '특화가 곧 미덕'은 아니었다. 책 한 권을 다 읽은 선비는 해당 책에 있어서 박사급 수준의 지식을 통달한 사람을 지칭했다. 특화의 끝판왕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아직 시작단계일 뿐이다. 선비들은 읽은 책을 바탕으로 꾸준한 토론을 지속해 삶에 대한 성찰을 지속했다.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삶이 곧 그들의 미덕이었다.

의심많은 새마저 편히 머물다 지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압구정. 청렴결백의 삶을 영위하며 도인같은 선비들이 주로 그곳이 앉아 정세를 논했다고 전해진다.

마찬가지로 양반집에서 왕왕(往往) 제사를 지냈지만, 이는 허례허식(虛禮虛飾)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제삿날이 많았던 이유도, 굶주리는 마을 주민들에게 밥 한 끼 먹고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도 없잖아 있다.(실제로 마을 사람들은 동네잔치를 줄줄이 꿰고 다니며 양반댁에서 밥을 얻어먹고 다녔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이런 문화는 명맥을 유지했다.) 특화가 미덕이었다면, 과연 굶주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옳았을까? 어떤 이문(利文)도 안 남는 행위는 비효율인데 말이다.




그럼 과연 오늘날의 '보편적' 특화선은 무엇인가? 개성이 곧 차별을 불러오지만, 우리에겐 개성은 없고 차별만 있는듯 하다. 선비의 나라답게 80% 육박하는 대학 진학률은 다른 나라를 둘러봐도 보기 힘든 성적이지만, 대학은 절대인구 감소를 외치며 '대학의 위기'를 경고한다. 지식에 대한 열망과 사회변혁을 꿈꾸며 소수의 학생들만 입학시켜 가르치던 그 대학이 말이다. 8090년대 대학가에 흥성이던 토론장은 사라지고 술 게임만 남아있다. 인문학적 고찰에 대한 토로는 어느새 불편한 주제로 자리매김한다.



일본처럼 가업을 잇는 삶을 사는 건 지루할 것이라 지탄하지만, 동시에 꿈을 좇는 사람들은 비효율이라 조롱한다. 자기에게 도움되면 쌍무적 계약관계로 바라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무심하다. 지식에 사유재 없다지만, 자신의 소마(Soma)를 남에게 알려줄 수 없다며 배타적으로 행동한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의 연속이다. 하물며 소신을 불편과 불쾌의 감정을 배출하는 것과 동일하다 착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기주의랑 개인주의는 다르다.)

함구하면 모두에게 이득이지만, 결국 모두 자백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른 사람을 신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아르, 사회문제, 철학, 역사를 다룬 문화 콘텐츠는 질색팔색 하며,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 히어로 영화 같은 말초적인 주제들은 쌍수(雙手)를 흔든다. 뉴스 볼 겨를도 없이 바쁘다고 토로하지만, 정작 유튜브 둘러볼 시간은 풍족하다.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이승권 만화가. 일상 만화<레바툰>을 그리지만, 종종 철학적인 이야기와 삶의 고찰에 대해 토로하기도 한다.

대중문화는 열렬히 추종하지만, 서브컬처는 꺼려한다. 일본문화, 중국문화에 불쾌한 시선을 내던지지만, 서구권 문화에는 서구인이 되지 못해 슬픈 존재처럼 열렬히 추종한다. 쌍수(쌍거풀 수술)야 90년대부터 대학가에 유행하긴 했지만, 이젠 중학생 때 해야 추후에 자연스러워 보인다며 수술실로 달려간다. (Banana라고 조롱받는 이유도 이런 맥락이다.). 정작 좋아하는 화풍, 연주자, 재즈 가수를 물어보면, 입은 달라붙는다.


이 모든 걸 배척하고 남은 특화선의 끝은 무엇일까? 모든걸 배척한 자에게 남은건 무엇일까? 찰나의 극대점을 향해 내달리는 것이 젊음의 특권이라 말하겠지만, 그건 특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신기루만을 쫓는 것과 다름없다. (Woke-Washing을 해라고 말하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무형의 정형화된 틀에 모두 알게모르게 갖힌다.

요괴가 인간 사회에 산다면?을 다룬 만화지만, 달리보면 사회적 소외자를 그린 만화다. 19,20세기 장애우들이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한 것을 생각해보면 쉬이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역설적이지만, 배척된 자들 사이에서 꽃은 피어난다. 인상주의도, 큐비즘도, 포스트 모더니즘도, 심지어 K팝의 중심축 중 하나인 힙합마저도 원래는 마이너에서 시작했다. 춘매추국각유시(春梅秋菊各有時)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모두 다 각자의 때가 있는 법이다.


네가 말한 위에 꺼에 다 해당되서 너무 "불편, 불쾌" 하다고? 오히려 좋다. 그대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반증하니 말이다. 인간의 신체적 젊음의 피크는 20대르지만, 두뇌는 예외다. 머리는 쓸수록 계발된다. 학창 시절, 그리고 대학시절 자신의 내면에서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귀 기울여 본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답해줄 테니 말이다.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




앤더슨 군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은 모두 가치 없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군. 안 그런가? 그게 네 두려움이야. 난 네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네 내면에는 매우 가치 있는 게 들어있다. “나는 이 세상 지붕 꼭대기에서 내 야성을 지르노라.”


Mr. Anderson thinks everything inside of him is worthless and embarrassing. Isn’t that right Todd. That’s your worst fear. I think you are wrong. I think you have something inside of you that is worth are great deal. “I sound my barbaric yawp over the roofs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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