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여기서 밝히고 있는 다자주의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보완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다자주의는 국제기구와 국제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이자 원리였으나, 실제상으로 작용한 효과는 미미하였다”라는 점을 미뤄봤을 때, 질문자는 체제를 통한 국가들 간의 협력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코헤인의 신자유주의적 제도주의를 내포한 것이 아닐까 톺아본다. “강대국의 영향력이 전통적인 다자주의를 희석시키고 있다”는 점을 미뤄봤을 때, 레짐 창출 이후 강대국이 이탈할지라도 새로운 레짐의 창출의 기회비용이 높기에, 그 기능이 여전히 유효할 것임을 내포한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코헤인은 <헤게모니 이후>에서 신현실주의자들의 기본 가정인 국가들 간의 무정부성과 생존지향을 수용하면서도 상호 간에 협력이 도출할 수 있음을 연속적인 게임이론을 통해 제시한다. 이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일국의 주권이 군사적 요소를 통해 보장과 존중이 이뤄지지 않는 점과, 러중의 밀월관계와 그 안티테제의 미국과 동맹국들 간의 대리전(proxy war)의 증가는 큰 문제점으로 보였을 것이다.
한편, (질문의 다자주의가 코헤인의 것을 가정했다면) 코헤인은 <헤게모니 이후>에서 어디까지나 국가들 간의 협력이 달성할 수 있는 부분을 경제적 요소에만 초점을 맞춰 설명한다. 그는 ‘군사적 요인’으로 인한 갈등과 위기관리에 대해 별도의 설명을 제공하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의 제국의회
무엇보다, ‘전통적인’ 다자주의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희석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각 국가는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며 다자주의의 원칙을 어기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이러한 한계점은 전지구적 체제로 팽창된 1945년 UN체제의 시작부터 꾸준히 발생해왔다. 즉, 오늘날의 전지구적 체제의 시작 속에서 성문화된 국제법의 순기능과 역기능은 함께 공존해왔다. 그리고, 키신저의 <외교>에서 유엔총회와 안보리의 기능은 신성로마제국의 제국의회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언급한 점에서, 본문 속 전통적인 의미를 나름대로 함축하고 있는 다자주의일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WMD를 들고 있는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 그는 2003년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의혹을 제기하는 연설을 했다.
러시아로 인한 다자주의의 희석과 위기를 지적했지만, 이러한 한계점은 미국에 의해서도 왕왕 일어났다. 가까운 과거의 예시를 들자면,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한 이후, 미국은 유엔안보리의 반대에도 불구, 영국과 함께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WMD)가 있다는 이유로 침공을 감행했다.
좌: 드골, 우:린든B.존슨
또한, (코헤인의 다자주의의 좀 더 적합한 예시를 들자면) 린든B.존슨 시절 1960년대 미국은 뉴딜을 계승한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건설과, 공산권 확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확장된 개입(Domino Theory)이 진행된 베트남전쟁을 동시에 진행함에 따라, 유럽권 국가(특히 샤를 드골의 프랑스)에게 일국의 국내정치적&국제정치적 이득을 위해 브레튼우즈 체제의 핵심인 금본위제의 규칙을 편의대로 악용한다는 거센 비판을 면치 못했다.
오바마 행정부 기간에 탄소배출규제에 대한 다자주의적 협약인 파리기후협약도, 트럼프 정권 때 탈퇴함으로써 유명무실이 되었다. 이후 개최된 COP에서도 어떠한 실천적인 진전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점은 진행형의 위기이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분명 본문 속 은연중에 내포되는 다자주의는 그 정신적 모계인 이상주의(idealism)를 내포하고 있기에 이상적인 개념일 것이다. 앞서 다자주의의 무색함을 제시함에도 불구, 안정과 발전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다자주의의 유연한 적용을 원용하는 점을 미뤄봤을 때, 질문자는 각국 나름의 합리(reason)적 사고의 가능성을 믿고 있으리라 유추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기에 앞서, 특정 강대국으로 인한 다자주의의 기능고장에 주안점을 두기 보다는 국제관계를 국제관계 그 자체로서 바라보고자 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하물며 오늘날의 국제사회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Jo Inge Bekkevold에서 지적되듯, 아직까지 국제관계에서 미국과 중국의 양극적인 강대국의 지위도 무시할 수 없지만, 동시에 Walter Russell Mead에서 지적된 ‘지정학의 귀환’처럼, 강대국 이외의 국가들의 중요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변화하는 사회를 재건하는 것은, 새로운 터전에 주택을 재건하는 것보다는 달리는 기차에 바퀴를 교체하는 것과 같다”는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의 주장처럼, 기발한 방안과 주장이 사회에서 일순간에 튀어나와 만능열쇠처럼 절대로 처방될 수 없다. 분명한 점은 과거의 위기를 어떻게 해쳐나갔는지에 대한 인지에서부터 끊임없는 위기에 대한 경보와 새로운 방안에 대한 해답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02. 미국의 이스라엘 정책 변화와 전쟁 지속에 따른 정치적 영향: 어떤 가능성이 열릴 것인가?
분명 미국과 이스라엘의 미묘한 입장 차로 인해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가 흔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노선의 변경이 초래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들 간의 협상과 교섭에 있어서 미묘한 입장 차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또한, 아무리 오늘날 종교를 가지는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다 할지라도, 미국에게 기독교적 가치는 지금까지도 매우 중요한 비물질적 가치이다. 즉, 수사의 연장선 상에서는 마치 양국의 관계가 흔들릴 것만 같은 ‘위기’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미국 이스라엘 공무위원회(The 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의 거대자본을 등에 업은로비집단의 존재를 차치하고서라도,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의 스펙트럼의 차이만 있을 뿐, 두 정당 모두 친-이스라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神)이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 인근의 땅을 약속했는데, 이곳을 사수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도와줘야만 한다는 종교적(evangalical) 입장에 입각해, 대승적인 지원을 역설하는 유권자의 목소리를 어느 대선 후보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Jake Sullivan의 The Sources of American Power: A Foreign Policy for a Changed World에서 지적되듯, 미국은 국가들 간의 상호의존을 높이는 방안으로서 인도-중동-이스라엘-유럽을 잇는 신경제회랑을 구상하고 있다. 그리고 2024년 2월 14일에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첫 발을 뗐다.
키신저
물론 회랑의 구축을 통한 상호의존 증대가 마치 키신저의 Doomsday Machine을 작동시키는 것만 같은 모습을 연상시킬 수도 있다. 한편, 런던 왕립거래소를 보며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상업의 발전으로 평화적 공존을 유지의 가능성을 목도한 볼테르(Voltaire)처럼,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 위한 경제적 상호의존 증대는 위기를 관리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볼테르
분명 Bremmer와 Kupchan의 EURASIA GROUP'S TOP RISKS FOR 2024는 오늘날에 산개한 모든 ‘위기’들을 찝어낸 글이기에 전체적인 사안을 개괄하기에 좋은 글이다. Davies, S., Pettersson, T., & Öberg, M. 또한 30년 내지 70년에 걸친 분쟁에 대한 통계와 설명은 한눈에 분쟁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유용한 글이다. 한편, 전자의 마지막 한 페이지의 무운을 빈다는 짤막한 글과 함께 미국 내부를 포함한 무수한 전지구적 위협들의 열거와, 후자의 미국 내부 이외의 전지역에 대한 점진적 위협 빈도수의 증가에 대한 설명은, 합일을 이뤄 마치 ‘역대급’ 위기 속에서의 무력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이를 고대하고 있는 것만 같아 보인다.
역대급 위기"들"(?)
하지만 ‘역대급’ 위기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당시에도 미국주도의 질서에 대한 회의감은 존재했고, 러시아에 대한 오마바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과, 중동전쟁을 종결짓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역대급’ 위기는 존재했다. 2008년 금융위기 속 증권화(securitization)에 따른 개인의 방만함에 대한 위기와 PIGS의 경제위기에 따른 EU의 ‘역대급’ 위기도 존재했다. 9.11테러에 따른 ‘역대급’ 위기, 냉전종식에 따른 통일-독일의 위협 가능성, 모두 ‘역대급’이라는 타이틀을 동반한 일련의 위기들로 그 당시에 여겨졌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진정으로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붕괴시켜 없애버린다는 의미가 내포된 “위기(crisis)”라고 표현하기는 한계점이 있으리라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지성사가 J.G.A. 포콕
코페르니쿠스, 뉴턴, 아인슈타인이 과학사에서 “'정상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위기”(crisis)에서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사람들이라고 제시한 쿤의 주장을 수용해, 명예혁명,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 그리고 양차대전이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찝은 J.G.A. 포콕처럼, 그때그때 유행을 따라 피상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데에서 나아가 문제의 근원을 찾아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숙고하고자 하는 자세가 국제관계학의 진가를 엿볼 수 있는 진정한 초석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Fine.
<참고문헌>
- Davies, S., Pettersson, T., & Öberg, M. (2023). Organized violence 1989–2022, and the return of conflict between states. Journal of Peace Research, 60(4), 691-708.
- Walter Russell Mead. 2014. The Return of Geopolitics: The Revenge of the Revisionist Powers. May/June 2014. Foreign Affairs
- Jo Inge Bekkevold, No, the World Is Not Multipolar: The idea of emerging power centers is popular but wrong—and could lead to serious policy mistakes. SEPTEMBER 22, 2023,
- Jake Sullivan. 2023. The Sources of American Power: A Foreign Policy for a Changed World. Foreign Affairs. Published on October 24,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