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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Mar 21. 2022

청청춘으로 진로를 돌려라

읽-다문득(多問得): 로봇 시대, 인간의 일

<북북서로 진격하라>로 번역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는 대표적인 번역 논란 사례 중 하나이다. 원제가 <North by Northwest>라 Northwest란 여객기를 북쪽으로 틀어라는 의미가 문법적으로 더 맞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어를 오독한 경우는 일상에서 흔하다. 대충 읽거나 알아 그런 것이다. 오늘의 "읽-다문득"은 청춘(혹은 젊음)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소위 “꺾였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자매품으로 25살을 기점으로 반(半)-오십이라 신세 한탄하거나 30살을 계란 한 판이라 푸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청춘은 저물어 가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개별의 내심(內心) 속 우린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린다. ‘첫’ 사랑을 잊을 수 없다는 것도 그대를 그리워하는 게 아닌, 그때의 젊음과 모든 것이 새롭고 순수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시대의 분위기와 정취가 벤 옷 스타일과 디자인을 은연중에 찾지만,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건축학개론’이나 ‘05학번 이즈 백’처럼 격세유전(Atavism)으로 인한 복고 열풍이 불 수 있지만, 그 시절을 겪은 이들에게는 익숙한 장면의 연속일 뿐. 몸도 마음도 예전과 다르다. 밤을 새워가며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미치기 어려워하고, 체력이 받쳐주지 못한 것에 한탄한다.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던 그 시절의 패기가 한편으로 그립기도 하다.

피식대학의 05학번이즈백, 보다보면 그 시절에 잠시 다녀온 것만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짝이던 그 시절을 향해 ‘여가시간’을 사용하며 내달린다. 내적인 안정감과 외적인 젊음이 넘치던 ‘그 시절’ 말이다. 그 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정말, 투쟁에 가깝게 자신의 경제적 여건이 다하는 대로 노력한다. 그만큼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조금이라도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틈새시간’에 피부 시술이나 미용도 하는 게 아닐까 생각도 든다. (낭설일 수도 있다. 개인의 선택의 동기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윤택해진 삶 속 ‘개인의 삶’과 ‘여가’에 대한 인식 재고(再考)는 공동체뿐만 아닌 개인(individual)도 주요 구성원으로 부상한 점을 반증한다. 이제 슬하에 자녀가 있다고 해서 부모님이 식주(食主)만을 위해 모든걸 내려놓는 시대는 5 공화국을 거치며 많이 희석됐다고 생각한다. 미(美)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설령 본인이 의(衣)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할지라도 본인의 최고의 전성기를 기억 못 한다 변명하는 건 자기부정이라 볼 수 있다.


아무리 ‘여가시간’을 젊음을 강령하기 위해 소모하더라도 이는 잠시 곁에 온 청춘일 뿐, 모조품이다. 일확천금을 벌면 여가시간에 젊음을 데려올 수 있다고 반박하겠지만, 지나간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 '시간'이 많다고해서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건 아니다.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것일까? 우린 ‘살결의 전성기’만을 향한 투쟁은 연령대를 불문한다.


지금까지 읽어보면, 외모지상주의를 힐난하는 글처럼 보일 수 있다. 단지 젊음'만'을 ‘여가시간’ 속에서 가꾸려는 우리의 모습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라는 점을 간곡히 이해해주기 바란다.

자기 관리하는 우리의 모습을 비판하고자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자기 관리란 엄연히 자신을 수련시키는 것이다. 건강한 몸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Sound body, sound mind”)라는 속담을 기억하시라. 여기서의 건강한 몸은 ‘젊었던 그 시절’의 육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몸이 돌아온다고 해도 건강한 정신이 곧장 깃든다 생각하는 것은 더욱이 원문을 곡해하는 것이다. 자기 관리라는 합리화 속 ‘살의 젊음’을 홀리듯 쫓지 말아야 한다. 건강한 정신이 깃들도록 더 정진해야 한다.


한편,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여가시간’의 의미는 고된 업무 이후, 재시작 전까지의 재충전의 ‘틈새시간’이다. 이런 ‘틈새시간’의 ‘여가시간’은 산업혁명 이후에 정립됐다. 그럼 진정한 의미의 여가시간은 무엇인가? 다음 노동까지의 오락을 즐기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아테네 학당의 그림 속 플라톤(왼)과 아리스토텔레스(오). 이상을 쫓거나 현세를 쫓는 각자의 특징을 손이 향하는 방향으로 논증한다. 위를 가리키는 손은 이상을, 그 반대는 현실을.

해답은 고대 그리스에서 찾을 수 있다. 여유롭고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생각과 논리를 구성할 수 있는 시간, 이것이 ‘여가생활’의 본래 모습이다. 당시에는 한정적인 자원을 소수의 사람이 누린 바, 이러한 풍토가 조성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존재할 수 있다. 한편, 그 시기가 서양사 여느 때보다 자유로운 사회적 풍토가 조성됐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괜히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온 게 아니다. 창발하는 생각의 다양성의 영광이 몇 천년이 지나도 영속되고 있지 않는가?


지금의 우리 모습은 자기 관리가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것 같다. 자기 생각과 논리를 구성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30대에는 20대를, 40대에는 30대를, 끊임없이 더 어렸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기만 하다. 마치 살결의 젊음이 도래했다 믿는 순간, 자신의 정신적 능력도 비약적으로 회복된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태면 육아를 맡을지라도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한 방법만 재활용한다. 자식에게도 20대로 달려가라는 말밖에 못 한다.

결국 종착지는 어디인가? 20대 대학 생활하며 ‘여가시간’이 넘치던 그때다. 위의 고기 비유를 연장하자면, 먹어야될지 모르지만 일단 고기 같아보이는건 많이 보유한 그런 상태일 것이다. 물론 이런 형식적 오류 가득한 논증은 이성적으로 터무니없다. 하지만, 우린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때론 감성에 압도되기도 하며, 가끔은 낭만을 위해 비합리적인 행위도 한다.


사유 행위는 갈수록 필요하겠지만, 사유의 부재는 갈수록 심화할 것이다. 정보의 디지털화는 빅데이터 구축을 통해 적실성을 높일 것이다. 1과 0도 여러 개 모여야 확률로 표시된다. 압도적인 연산속도 덕분에 기술의 합리성과 효율성은 높아졌지만,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인간은 한없이 작아졌다. 탈(脫) 생물 동력 기반의 전자적 지능 기계는 이제 인간의 자리도 넘볼 준비 중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정보의 재조합과 콜라주(Collage) 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창조할 수 있는 힘과 논리구조를 짜내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 논리인 알고리즘에 따라 컴퓨터가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런 기술적 진보에 발맞추는 것을 차치하고, 또렷한 목표 의식의 확립과 자기 수양을 통한 극기(克己)는 생명이 다 하는 순간까지 '여가시간'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책을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독서가 싫다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도 대안일 것이다. 자고로 얼굴이란 얼이 굴(窟) 속에 담겨있는 형태를 뜻한다. 사유해야 얼은 또렷해진다. 형극의 길을 살았다 할지라도, 얼이 곱고 또렷하다면 돈을 바른 얼굴보다 더 고울 것이다. 괜히 살아온 이력이 얼굴에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늘어진 살들 속 도도히 치켜들고 있는 실리콘 콧대보다 극기의 삶을 살아온 자의 얼굴은 훨씬 아름다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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