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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Oct 03. 2024

잘못은 우리 별에 있는게  아닌, 노예된 우리에게 있다

키케로 <법률론>, <의무론> Response Paper

“인간은 본디 동물이기에, 본성과 본능에 충실한 것이 당연하다”라는 말을 어떤 사람이 발화한다면, 과연 그 사람은 본인 또한 그러한 존재라 겸허히 수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러한 분석을 추론한 스스로를 이성과 합리로 무장한 인간이라 자만하고 있을까?

그의 변호사 경력의 정점이었던 카틸리나 탄핵 연설

개인 나름의 답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절충적인 입장을 내놓을 거라 생각한다. (필자의 경우, 미래에 일어날 일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짐과 동시에, 과거를 반추하며 반성할 수 있는 것이 곧 인간이라 답하고 싶다.)

좌: 플라톤, 우: 키케로

키케로는 <법률론>(<국가론>도 마찬가지)과 <의무론>을 나름의 위기 속에서 각각 기술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 공직자로서의 전성기 이후의 황혼 속에서 실천가이자 철학자로서 정체(政體)에 대한 분석을 행한다. <국가>와 <법률>을 집필한 플라톤에게 심대한 영향을 받은 키케로인지라, 플라톤을 본받아 키케로도 <국가론>와 <법률론>을 저술한다.

후자의 경우, 로마의 공화정 쇠망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에 대한 글을 아테네에 있는 아들에게 철학자의 면모를 조금 더 담은 채 남긴다. 아들에게 <의무론>을 보낸 이후, 키케로는 본격적으로 시민들의 분노를 부추겨 2차내전을 촉발시킨 안토니우스를 격렬하게 비판하며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피운다.

실천하는 삶과 정치적으로 좌천돼 관조하는 삶을 자의 반 타의 반 겪게 된 키케로는 과연 스토아학파의 일원으로서의 절제와 이성의 중요성에 방점을 둠과 동시에, (특히 <법률론>에서) 로마의 의례(ceremony)와 절차에 대해 고뇌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어휘를 동시에 구사하는 절충적인 모습을 보인다.

편, 절충적인 키케로가 공화정의 운영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 지는 않은 것만 같다. 이러한 면모는 <법률론>에서 잘 드러난다. 한편, 글 제목에서 예상되는 정치체제와 법률의 문제를 지적하는 내용과 달리, 기존에 운영되던 법률에 세련을 가하면서 “법률은 말없는 정무직이고, 정무직은 말하는 법률이다”라며 이것이 주요 문제가 아님을 피력한다.

오히려 키케로는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는 게 아닌, 노예된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The fault, dear Brutus, is not in our stars. But in ourselves, that we are underlings)”는 말처럼, 이를 운용하는 사람을 비롯한 통솔받는 자의 문제가 더 크다는 점을 역설한다.

다시말해 권력은 순종[1]에 부는 만족에 있음을 인지하기를 강조하며, 공직자에게는 슬기로움과 성실함을, 통솔받는 자들은 본인들도 그 자리에 언젠가 있게 되리라는 점을 생각하며 그들을 견제하기를 바란다.

나아가 사물을 비판함에 선함 점들은 제외하고 악한 점만 열거하고 폐단들만 선정하는 것은 불공정하며, 이런 식으로 말하면 어떤 직도 비난을 비켜나갈 수 없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각 직위 나름의 유용성이 존재하고, 시민이 권위에 (폭력을 통한 비자발적인 이양이 아닌) 조화롭게 양보하도록 유인하면서 자유를 부여하는 방법이 중요함을 덧붙인다.

정치인이자 철학자로서 각각 연설과 집필한 키케로이기에, 분할되어 있는 정치의 영역과 철학의 영역을 통합하고자 시도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치와 철학 사이에서 무엇이 더 우월한지에 대한 논의의 분분함 보다는, 키케로에 대한 시사점을 자기 스스로에 대한 메타인지(metacognition)를 지향하고자 한 인물이라 여기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서리와 꼭짓점으로 각기의 끝이 있는 다각형과 달리 "출발점으로 하염없이 되돌아오는 원에는 끝이 없다"는 말처럼, 행동과 발화(發話)로 인한 역설과 등잔 밑을 바라보려는 자세가 제일 중요하다고 키케로는 제언한다.

<키케로의 죽음> - 프랑수아 페리에

이런 점에서 견제와 균형의 공화정 속에서 권리만을 원용하기보다 의무를 먼저 생각하는 그의 공화주의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게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Fine



[1] 또 그들에게 통솔하는 방법만 정해주면 되는 것이 아니고, 시민들에게도 복종하는 방법을 정해주어야 하네. 왜 그런가 하면 통솔을 잘하려면 본인도 언젠가 누구에게 복종해 보았던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네. 그리고 공손하게 복종하는 사람은 언젠가 통솔하기도 합당한 사람으로 보이지. 따라서 복종하는 사람은 자기가 어느 시기엔가 통솔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필요가 있지. 또 통솔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머지않은 시기에 자기도 복종을 해야 하리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네. 우리는 또한 정무직에 복종하고 순종하라고 지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받들고 사랑하라고 지시한다네. - 키케로 <법률론> 성염 역. p.194-195



<읽은 문헌>

- 키케로, <의무론> (허승일 역. 서광사)

- 키케로, <법률론> (성염 역. 한길사)

- Pangle, Thomas & Peter Ahrensdorf, Justice Among Nations: On the Moral Basis of Power and Peace (Kansas City: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9), Ch. 3, pp. 5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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