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빛이 모든 밤을 밝힐 순 없다. 짙어지는 어둠에 때론 어둠으로 맞서야 한다. 그 위태로운 어둠 속에서 빛을 잃지 말아야 한다. 다가올 새벽을 기다리며. 끝없이 빛을 비춰야 한다. 진심은 언제나 전해지는 법이니까
Simon & Garfunkel - The Sound of Silence
출처: 나무위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주안점이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넘어, <정치학>에서는 국가와 개인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야 할지에 대해 논의한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말미에 정치학에서 논의를 이어가겠다고 말한다).
출처: 네이버 시리즈온
그는 정치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개개인 이전에 국가의 전제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국가의 대의(greater good)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인 생각은 지양했다. 어디까지나 정치적 동물인 인간이 각각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주장했고, 개인보다 더 큰(가령 집단) 단위들이 제각기 모여 공동선(common good, 여기서의 common good은 공공재를 의미하지 않는다)에 기여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했다.
나아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법과 정책을 통한 정비와 시민성의 변화를 제언한다 [1]. 정의를 구하려면 중용을 행해야 함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분명한데, 법이 바로 중용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여러 정치체제를 분류하기는 하지만) 이것의 옳고 그름보다는 점진적인 개선과 혁신을 목표로 했다. 그 과정에서 정체를 법에 맞추는 것이 아닌, 법을 정체에 맞춰가되, 최선의 정체뿐만 아니라 실현할 수 있는 정체도 고찰하기를 제언한다 [2].
한편, 상기의 가치를 제언하기에 앞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드시 서로에 대한 미덕을 함양하는 우애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원용하는데, 이 부분이 (상황따라 다변하는) 이상적인 정체로 다가가기 위한 그 시작이 아닐까?(우애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치들 중 하나라 마찬가지로 주장한다). 정체와 법이 마련됐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습관과 훈련, 그리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3).
아리스토텔레스와 젊은 알렉산더, 출처: 네이버 시리즈온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가르쳤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도 해당된다. 사람들은 학살(slaughter), 약탈(pillage), 혐오(hatred)의 세월을 쉽게 묻어두지 않고,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리포스는 그리스를 정복하고 분열시켰으며 많은 이들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알렉산더는 이들을 규합해 다민족의 페르시아로 진군한다).
필리포스는 정복(conquer)할지라도 통치(rule) 하지는 못했다.통치자(ruler)가 되기 위해서는 최고의 수양을 해야 한다. 그래서 침착함(patience)이 필요한 법이다. 아리스토텔레는 이를 중점을 둔 채 알렉산더를 교육한다.
분명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하자면) 안수정등(岸樹井藤) 설화 속 쥐가 갉아먹고 있는 등나무에 매달려 구덩이에 있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한 채, 홀로 달콤한 꿀을 받아먹기만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차라리 구덩이 위로 올라와 사자와 싸우거나, 구덩이 아래로 떨어져 독사들을 다 잡아내고 구덩이 위로 올라올 덕성을 기르기를 바란다.
전자는 사자를 잡아 옷가죽으로 사용한 헤라클레스가 되기를, 후자는 뱀들 중 이무기가 되어 여의를 물고 (개천에서 용 나듯) 용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프시케 신화처럼 명계로 직접 내려가 아프로디테와 데메테르의 과업을 수행한 후, 여신의 반열에 오르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네이버 시리즈온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는 나름의 공통점이 있다. 홀로 과업을 수행할지라도, 그 누구도 스스로 해냈다는 사실로 착각해 오만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유아독존이던 헤라클레스는 과업을 진행하면서 스스로를 비우는 법을 배우며 여타 영웅들의 귀감이 된다. 이무기는 1000년이 됐을 때 인간에게 용이라 불려져야비로소 용으로 탈바꿈한다. 프시케는 남편이 뱀괴물이라는 누이의 말을 전적으로 오만하게믿었지만,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며 뉘우치고 결국 남편 에로스의 도움으로 명계를 벗어나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교사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진정으로 제왕학에 가까운 글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출처: 네이버 시리즈온
Fine
[1] 정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여러 종류인 만큼, 정체도 분명 여러 종류일 수밖에 없다. 정체는 공직에 관한 제도이며, 공직은 언제나 상이한 계층이 갖고 있는 힘에 따라 또는 양자 사이의 어떤 평등의 원칙에 따라 배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분들의 우월성과 차이에 따른 조합만큼이나 많은 정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정치학은 1. 어떤 정체가 최선의 것인지, 외적인 장애 요인이 없을 경우 이상적인 정체에 가장 부합하는 정체는 어떤 종류인지, 2. 개별국가들에 어떤 정체가 적합한지 고찰해야 한다. 최선의 정체를 도입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국가의 경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훌륭한 입법자와 진정한 정치가는 절대적인 최선의 정체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최선의 정체에 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 3. 정치학은 실재하는 정체에 관해 그것이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으며, 일단 생겨난 뒤에는 어떻게 해야 오래오래 존속될 수 있을지 고찰해야 한다. 한 국가가 필요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최선의 정체를 도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서도 최선이 아닌 더 열등한 정체로 만족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끝으로 정치학은 그 밖에도 어떤 정체가 대부분의 국가에 가장 잘 맞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대개의 정치 이론가들이 좋은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그다지 유용하지 못하다. 우리는 최선의 정체뿐 아니라 가능한 정체와 가장 쉽게 실현될 수 있고 모든 국가에 가장 잘 맞는 정체도 고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들 정치 이론가 중 일부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많이 요구되는 가장 완전한 국가만 찾고, 다른 일부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두루 통용될 수 있는 정체를 기술하되, 기존의 정체들은 무시해 버리고 특정 정체, 이를테면 라코니케 정체를 찬양한다. 그러나 정체를 새로 도입하려면 그것은 기존의 정체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쉽게 받아들일 마음이 내키는 그런 정체여야 한다. 그래서 낡은 정체를 개혁하는 것은 새로운 정체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마치 어떤 것을 고쳐 배우는 것이 처음 배우는 것만큼 어렵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정치가는 앞서 말했듯이, 방금 언급한 미덕들에 덧붙여 기존의 정체들을 개선할 줄도 알아야 한다 (<정치학> 천병희 역. 197-198).
[3] 그러나 법적으로는 민주정체가 아닌 정체들이 실제로는 습관(ethos)과 훈련(agoge)에 의해 민주정체처럼 운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정체가 법적으로는 민주정체의 요소가 더 강한데 습관과 훈련에 의해 과두정체처럼 운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은 특히 정체의 변혁 후에 일어난다. 시민들은 하루아침에 옛 습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이긴 쪽이 진 쪽의 이익을 조금 침해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결과 권력은 정체를 변혁한 자들의 손에 넘어가도 기존의 법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한다 (<정치학> 천병희 역. 20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