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 다문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lleatriz Nov 09. 2024

존 스튜어트 밀이 온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Response Paper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나가야 한다. 한강 著 <소년이 온다(Human Act)> 中

좌: 존 스튜어트 밀, 우: 한강

사회적 번혁을 가능하게 하거나 바람직하게 하려면 현재 노동 대중을 구성하고 있는 교양 없는 대중에게나 이들의 고용주들 대다수에게 똑같은 정도의 성격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깨달았다. 이 두 계급은 다 같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편협한 이해관계 때문에만 일하지 않고, 박애적인 목적 혹은 적어도 공공의 사회적 목적을 위해서 일하고 협력하는 것을 실천에 의해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인류에게 언제나 있었고, 또 현재 소멸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소멸할 것 같지 않다. 교육, 습관, 정서의 도야(陶冶)가 평범한 사람으로 하여금 조국을 위하여 기꺼이 싸울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처럼, 또한 그로 하여금 밭을 갈고 길쌈질도 하게 할 것이다. 물론 일반 대중을 이만큼 교육시키는 것은 오직 서서히 될 수 있는 일이요, 또 여러 대에 걸쳐 조직적인 교양을 줄곧 쌓아 올림으로써만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적인 체질 속에는 장애물이 없다. 공동의 복리에 대한 관심은 현재 아주 미약한 상태에 있는데, 그것이 본래 강렬하게 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아침저녁으로 오직 개인의 이익이 되는 것에만 집중되는 그만큼, 공동의 복리에 집중되는 습관이 아직 붙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오직 이기심만이 일상생활에 의하여 활동하게 되어있지만, 공동의 복리에 대한 관심이 또한 이와 같이 일상생활에 의하여 활동하게 되고, 또 남달리 뛰어난 것을 좋아하는 심성과 부끄러운 일을 두려워하는 심정에 의하여 배후로부터 박차가 가해지면,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서도 가장 벅찬 노력과 가장 영웅적인 희생을 낳게 할 수가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中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은 양적 효용의 제레미 벤담을 스승을 두며, 효용 개념을 질적 의미를 삽입해 발전 계승한 존 스튜어트 밀로 익히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동인도회사에 근 33년간 재직하면서, 영국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글들을 많이 기고했다. 이에 어떤 사람은 그가 제국주의자라 평가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가 자유주의자라 설명한다. 또는 제국주의와 자유주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말한다.

 한편, 진정한 “밀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이처럼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미궁(labyrinth)을 만나게 되는 수수께끼라고 한다면, 오히려 당시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제국주의자 밀’이라는 모습에 당황한 우리들로 하여금 정체성 논쟁에 덜 시달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존 스튜어트 밀과 알렉시스 드 토크빌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서로의 우정이 아주 애틋하고 각별한 사이라 추대하면서 만개한다. 그리고 밀은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자신의 지적 기반과 풍토를 바꾸게 되는 계기와도 같다고 설파했다 [1]. 실제로 둘은 서로의 고국(밀은 영국, 토크빌은 프랑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 둘 다 프랑스에서 작고했다.

한편, 이들의 우정은 프랑스의 알제리 속국화의 과정에서 갈라서게 된다. 토크빌은 밀에게 정치인이라면 자국의 자존심과 이익을 확대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크빌)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프랑스의 상업으로 인한 덕성의 부패와 보신주의(保身主義)의 만연함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식민지 확장을 통한 민족주의 고취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드는 위대한 사업을 통해 프랑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런 생각은 밀과 완전히 관점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물론 밀의 입장에서 토크빌의 주장과 관련해 그 고민을 이해하는 듯한 발언을 남겼지만, 밀로서는 경계해야만 하는 발상이었다.

이미 상업사회의 재편과 상비군의 도입으로 인한 국가의 팽창과 사치의 만연화로 인한 충격과 공포의 18를 겪은 잉글랜드를 자신의 아버지 세대와 할아버지 세대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듣고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

좌: 데이비드 리카도, 우: 제임스 밀

(밀의 아버지를 포함한 [밀에게 둘 다 아버지 뻘이던] 제레미 벤담과 데이비드 리카도가 수식으로 수지타산을 계산해 식민지의 무익함을 증명한 것은, 이전 세기의 확장된 국가 기능에서 오는 정치적 부담과 재정적 부담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와중에 토크빌의 민족주의 고취에 대한 주장은 밀에게 좋은 선지(選支)는 아니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밀의 동인도회사 재직 당시 ‘인도사람들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는 자신의 주장이 논리적 일관성과 진정성 있었다 소명할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으로) 18세기 영국과 같은 반목의 과정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2][3][4]. 이에 그의 성향을 관용적 제국주의’(tolerant imperialism)라 정당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5][6].

그럼에도 여전히 그가 대영제국 출신의 제국주의자라는 요건을 충족한 점을 미뤄봤을 때 밀을 서구중심주의에서 탈피하지 못했으며, 동양을 고려하지 못한 채 서구 보편적 가치에 천착했다고 피력할 수 있다.

And Before I Knew Me

다만, 밀의 <자유론>에서 강조하는 공동선을 함양하기 위한 상호간의 토론과 소통의 중요성, 그리고 과도한 개입을 지양하는 방식의 호혜주의(reciprocity)를 미뤄봤을 때, 어쩌면 그는 동양적인 것을 거칠게 톺아보고 서구중심주의를 탈피하려는 행위 자체가 본인의 섣부른 행동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7]?

설령 밀이 상기의 비판점들을 숙의하고 고려해 글을 남겼더라도, 이를 도리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재단했다는 사실로 인해 후대의 비판을 마찬가지로 면치 못했을 것이다 [8].

무엇보다 밀이 <자유론>을 집필한 이후, <여성의 종속>과 <공리주의>를 집필하던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던 남북전쟁에 있어 노예해방과 북부의 승리를 축원했다. 게다가,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속국이던 자메이카의 백인 측의 부당한 행위로 인한 흑인반란을 옹호했다.

뿐만 아니라, 상기 사건들이 일어나던 당시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참칭하던 이들을 포함해 상류계급과 중류계급의 대다수 사람들이 남부진영이 승리하기를 바랐다는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했다. 이런 점에서 그를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제국주의자라 쉬이 재단할 수 있을까?

좌: 동인도회사 깃발, 우: 인도제국 국기

어쩌면 당시의 밀에게 있어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인도에 동인도회사가 들어와 있는 상태는 영국 국왕이 황제로 겸임해 건국한 인도제국(Indian Empire)보다 최소한의 자유를 보전하기 위해 적극적 자유가 실행되고 있는 상태라 봤을지도 모르겠다 [9].

요컨대, 그는 오히려 동인도회사가 오래전부터 인도에 들어와 있는 선의의 제국주의적 간섭(paternal imperialism) 상태 속에서, 해당 지역의 사람들이 스스로 (서구에서 말하는) 문명과 번영을 서구에 입증하기를 바랐지 않았을까..?

단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와 상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1]

토크빌을 연구함으로써 내가 또 한 가지 큰 유익을 얻은 부수적 문제는 중앙 집권에 관한 근본 문제였다. 그는 미국과 프랑스의 경험을 철학적으로 날카롭게 분석한 결과, 사회전반에 관한 일이 국민 자신에 의하여 안전하게 수행될 수 있는 한, 국민 자신에 의하여 수행되어야 하고, 행정부는 국민의 기관을 젖혀 놓고 무엇을 하거나 혹은 국민의 기관의 실행 방법을 좌지우지함으로써 개입하는 일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것을 더없이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시민 개개인의 이러한 실제적 정치활동을, 사회적 감정과 인민의 실제적 지력을 훈련하는 데 가장 유효한 수단,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하고, 또 좋은 정치에는 없을 수 없는 수단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또한 민주주의에 특유한 약점 몇 가지에 대한 특별한 방어책이요, 또 현대 세계에서 정말로 일어날 위험성이 있는 유일한 전제정치로 타락해 가는 것을 막는 불가결한 방지책으로 보았다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최명관 역, p. 199-200).


[2]

토크빌은 동인도회사에 재직하던 밀에 표리부동적(hypocritical)이고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것과 같다며 거세게 비판한다. 다만,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와 관련해 둘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된 시점에서 토크빌이 이러한 주장을 했다는 점에서 토크빌의 가시 돋친 언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나아가 둘의 관계가 악화된 이후에도 공동선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습속의 쇠퇴에 대한 신경증적인 경고를 유사하게 피력했다는 점에서 토크빌의 비판을 축자적으로 받아들이기는 더 어렵다.


[3]

실제로 밀은 인도 지배가 인도 사람들에 대한 봉사일 뿐 영국의 국가이익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단지 인류의 보편의 이익(문명, 평화, 그리고 번영)에 기여할 경우에만 제국주의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신념이 있었다.


[4]

국민 대중이 권세를 쥐는 데 제일 요긴한 패스포트가 되는 것을 언제나 가장 소중히 여기는 터인데, 영국의 제도 아래에서는 세습 부자이든 자수성가한 부자이든 여하간 정계에서 출세하는 데 있어 부(富)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된다. 이 부와 부의 간판이 진정으로 존경받는 유일한 것이 되었고, 또 국민의 생활은 주로 이것을 추구하는 데 온통 바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귀족 계급과 부자 계급이 정권을 쥐고 있는 동안은, 국민 대중을 교육하고 그 처지를 개선해 주는 것이 귀족과 부자 계급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런 교육과 개선이 국민 대중을 강력하게 하여 그 멍에를 벗어 버리는 것을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정부에 크게 반영되어 일반 대중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정부에 많이 참여하게 되면 정말로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여러가지 과오, 특히 재산을 부당하게 침해하게 될 과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일반 대중의 교육을 촉진하는 것이 오히려 부유한 계급의 이익이 될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생각에서 나는 전과 같이 민주 제도를 열렬히 지지했을 뿐 아니라, 또한 오웬주의와 생시몽주의 및 이 밖의 모든 사유재산 반대설이 빈민 계급 사이에 널리 퍼질 것을 진지하게 바랐다. 이것은 내가 이 학설이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거나, 이것들이 실천될 것을 바랐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상류 계급 사람들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은 교육을 받을 때보다도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에 더 무섭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최명관 역, p. 180).


[5]

밀이 동인도회사에 재직했다는 사실 자체에 천착해 그가 (우리에게 제국주의라고 했을 때 으레 다가오는 인상의) 제국주의자라 비판할 수 있다. 다만, 밀 본인의 자서전에도 언급되어 있듯, 그는 이팔청춘을 갓 넘긴 17세에 동인도회사에 부친의 권유로 취직해 자의반 타의반 회사에서 33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 속에서 그의 우울증을 고치고자 지적고양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인류 전체의 운명이 언제나 내 생각 속에 있고, 또 나 자신의 운명과도 분리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당대 여느 문필가들보다 급진적(이자 오늘날 숨 쉬듯 당연히 여겨지는)인 저술들을 남기게 된다.


[6]

또한, 이 당시(19세기) 영국(United Kingdom) 내부[정치가]에서는 유럽 밖으로 벗어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적 흐름이었다. 오늘날 리콴유의 나라로 한국에 익숙한 싱가폴도 그 건설자는 19세기 영국인 토머스 스탠퍼드 래플스다. 도시국가 위주의 고대 그리스 시절 고대인들처럼,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본국을 떠나 건설하는 것이 하나의 명예이자 소양이라 여기는 분위기는 만연했다.


[7]

영국적 기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영국인의 성격이나 영국의 사회적 환경은 동정심을 발휘함으로써 행복을 얻는 일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동정심이 영국인의 생활체계에서 거의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조금도 놀랄 것 없는 일이라 언급한다.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최명관 역. P. 160-61)


[8]

만일 누가 나더러 하나의 철학으로서 내가 버린 것 대신 어떤 정치 철학의 체계를 가지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 체계도 새로 가진 바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다만 나는 옳은 체계란 내가 기왕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각적인 것이요, 그 임무는 일련의 모범적 제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에도 적합한 제도를 연역해 낼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을 따름이다… 즉 인간 정신의 진보는 일정한 순서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어떤 것들이 반드시 다른 것들에 선행하는 것으로서 정부와 사회의 지도자들은 이 순서를 어느 정도까지는 바꿀 수 있으나 무한정 바꿀 수는 없다는 것, 정치 제도에 관한 모든 문제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또 인류의 진보의 여러 단계는 서로 다른 제도들을 자연히 가지게 될뿐더러 또한 마땅히 가져야 한다는 것, 정권은 언제나 사회 안에서 가장 강력한 자의 수중에 있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자의 수중으로 옮아가는 것이며, 이 세력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여러 제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제도가 이 세력에 의존한다는 것, 정치 철학의 일반 이론은 그 어느 것이나 위에 말한 인간 진보의 이론을 전개하며, 이것은 역사 철학과 다른 바가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최명관 역, p. 169-71).


[9]

나는 이제 <정치론>에서 주장한 아버지의 설을 과학적 이론으로 보지 않게 되었고, 대의제 민주정치를 절대적 원리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시간과 장소와 환경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또 나는 이제 여러 정치 제도 가운데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물질적 이익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덕과 교육의 문제라고 보게 되었다. 즉 그것은 주로 국민이 앞으로 더욱 진보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국민의 생활과 문화의 면에서 어떤 큰 개선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과 또 ‘어떤 제도가 그 개선을 가장 잘 촉진시켜 줄 것인가’ 하는 것을 숙고함으로써 결정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최명관 역, p. 169-79).


<읽은 문헌>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서병훈 역. 책세상)

-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최명관 역. 창)

- 서병훈. “존 스튜어트 밀의 위선?: 선의의 제국주의” <철학연구> 98집

- 서병훈. "제국주의자’의 우정: 존 스튜어트 밀과 토크빌" <한국정치학회보>, 46(5), 5-24.

- 박동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와 제국주의: 실존과 시의의 관점에서" <국제정치논총>, 50(4), 29-54.

- 한강, <소년이 온다(Human Act)> 창비

- Walzer, Michael. “Mill’s ‘A Few Words on Non-Intervention’: A Commentary”, in

Urbinati and Zakaras, J. S. Mill’s Political Thought (Cambridge, 2007), pp. 347–

356.


매거진의 이전글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