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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norance is Bliss?

플라톤 <알키비아데스>, <메넥세노스> Response Paper

by Belleatriz
아스파시아와 페리클레스

<메넥세노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치 유망주 메넥세노스에게 올바른 추도사란 어떤 것인지 페리클레스의 아내 아스파시아의 이름을 빌려 발화한다. 플라톤의 여타 저술 속에서 질문만을 던지던 모습과 달리 그녀의 입을 빌려 추도사를 읊는다.

<The Debate of Socrates and Aspasia>, Nicolas-André Monsiau

실제로 소크라테스 본인은 아스파시아를 자주 만나러 갔으며, 그녀로부터 많은 수사학적 지식을 배웠고 교류했다. 이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페리클레스 편에서도 뒷받침해주고 있다 [1].

다만, 페리클레스 추도사의 그 의미와 중요성을 미뤄봤을 때, <메넥세노스>에서 보이는 연설이 아스파시아 본인이 직접 발화한 추도사이기보다는, 소크라테스(이자 플라톤)가 직접 어떤 추도사가 더 좋은 것인지를 알려주려 했던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언도받아 독배를 마시고) 몇십 년이 지난 후에 플라톤이 <메넥세노스>를 집필했기에, 이를 온전히 소크라테스의 말이라 판단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테네와 플라톤

플라톤이 보수적으로 잡았을 때 기원전 428년에 태어난 점, 그리고 <메넥세노스>가 <국가>가 집필되는 시기의 중기 대화편임을 미뤄봤을 때, 아스파시아의 이름을 빌린 소크라테스를 활용해 플라톤이 <국가>에 걸맞은 지도자의 연설과 담화는 어떠해야 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게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한다.

한편, 소크라테스의 추도사(이자 플라톤의 추도사)는 페리클레스의 추도사와 비슷한 구조를 띄지만, 각각의 추도사는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추도사 간의 우열을 논하기보다, 두 연설 사이에서 균형을 어디에 어떻게 둘 지에 방점을 둬야만 한다.

평소 소탈하게 생활하며, 사익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고, 사안이 중대하고 연설이 필요한 경우에만 연단에 섰던 페리클레스의 경우,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돌아온 사상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추도식 참여가 가지는 그 의식의 엄숙성과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추도사를 읊은 기원전 431년 이후로 근 25년 동안(404년까지) 그리스지역은 아테네 동맹과 스파르타 동맹 간의 2차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다시말해, (사후적으로) 그의 추도사는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1년 차에 접어들던 때에 행해졌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위해서든, 아테네의 참주라는 자신의 지위에 의해서든 [2], 페리클레스는 도시국가적 공동생활에 참여함으로써 누리는 선은 그 어떤 차원의 선보다 고차원적이며, 아테네라는 국가와 자유는 사회의 어떤 부분과 집단보다 상위에 위치해 목숨을 바쳐 헌신해야 할 숭고한 대상임을 일깨워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전의 선조들에 대한 감사를 간단히 표한 후, 함께 추모하는 사람들을 비롯한 전사자들에게 감사와 영광에 방점을 둔 채 연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청빈하게 살아온 그의 삶 덕에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본인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에 산파술로 질문을 던짐으로써 상대방에게 자신이 유일하게 아는 것(무지(無知)의 지(無知))을 가르쳐주던 소크라테스(이자 플라톤)는 페리클레스와 다른 상황에 있다.

그의 연설은 어디까지나 메넥세노스에 한정해 연설하고 있으며, 그를 훈육하는 과정에서 추도사를 읊기 시작한다. 지도자 교육의 일환으로 소크라테스(이자 플라톤은) 페리클레스라는 아테네를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만든 이상적인 지도자임에도, 어떠한 부분이 더 세련되면 플라톤 본인이 생각하는 통치자다운 면모를 보일 수 있을지를 피력한다.

나아가 아테네 역사에 대한 약간의 과장과 가감이 존재하지만. 토착인 전설(신적이며 자연적인 결과물)을 바탕으로 자유인으로서 오랜시간 한 지역에 터를 잡아 만개한 아테네의 민주정과 이방인들과의 시민적 연대성을 존속한 그 포용성을 칭송한다.

페리클레스(와 아테네)가 일으킨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오늘날의 무역봉쇄 조치와 비슷한 메가라 법령을 발의해 메가라[3]상인들을 아테네에서 배제시켜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던 스파르타와 아테나 사이의 긴장국면을 조성시켰기 때문이다.

요컨대, 플라톤은 대쌍적인 관계를 띄고 있는 군인 페리클레스와, 아스파시아의 입을 빌린 소크라테스를 통해 긴 호흡으로 조망할 수 있는 역량을 함양하기를 제언하는 것이 아닐까?

“꼭짓점이 존재하는 다각형과 달리 원에는 끝이 없다”는 말처럼, 원의 가장 먼 곳은 그 시작점과도 같다. 즉, 형식과 본질 속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아는 형이상학(metaphysics)적 사고는 필요하다.

지금이라는 상황 속에서 최선(最善)과 최대(最大)를 끌어내고자 숙고하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며, 때로는 자신의 과오에 사과하는(이자 영혼을 세련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메넥세노스>에서 얻을 수 있는 국제정치사상적 함의가 아닐까 (4)?

여행자여 길이란 없다, 길은 걸으면서 만들어진다 - 안토니오 마차도

훌륭한 일만을 행하며 전혀 실수하지 않는 것은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스스로 실수를 교훈 삼아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다 보면 현명하고 고결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단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Fine



[1]

어떤 사람은 페리클레스가 단지 아스파시아의 지혜와 정치적 수완에 이끌린 것이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도 친구들과 함께 이 여자를 자주 찾았다고 하며 어떤 사람들은 자기 부인까지 데리고 가서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고 한다. 아스파시아는 젊고 수준 높은 창녀들을 집 안에 두고 있었으니 그녀의 직업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2> 김병철 역. p.89)


[2]

추도사를 거행한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였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인들을 설득시켜 코린트의 침략을 받은 코르키라이로 구원군을 보내서 강한 해군을 가진 섬나라를 동맹국으로 얻고자 했다. 펠로폰네소스 인들은 예외 없이 아테네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여 구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페리클레스는 한때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였던 키몬의 아들 라케다이모니우스를 장군으로 삼아 겨우 10척의 군선을 파견하였으니, 이것은 라케다이모니우스를 고의로 모욕하려는 것이었다. 키몬의 일족은 스파르타인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까닭이다. 그가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라케다이모니우스에게 몇 척의 배를 딸려 내보낸 것은, 만일 이렇다 할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스파르타 인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더욱 심각한 지경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의도에서였다….이로해서 페리클레스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없는 겨우 열 척의 배를 보냈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공연히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든다는 불평이 높아졌다. 페리클레스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증원군을 코르키라로 보냈지만, 이 군대는 싸움이 끝난 뒤에 그곳에 도착하였다. 코린트인들은 아테네 인들의 행동에 매우 분개했다. 그들은 스파르타의 의회로 가서 아테네 인들을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 메가라 인들도 이에 합세하여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리스 인이라면 어느나라 사람이나 기본권리와 평화를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테네 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저잣거리나 항구로부터 메가라 인들이 모두 축출되었다고 호소하였다. 아이기나 인들도 아테네의 압제와 학대를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아테네를 비난하기가 두려워 몰래 스파르타에 호소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코린트의 이민지면서 당시 아테네가 점령하고 있던 포티다이아 시가 반란을 일으켰다. 포티다이아 시는 아테네 군대에 의해 포위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전쟁의 시작을 재촉한 결과가 되었다. 이 모든 것 것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무스는 아테네로 사신을 보내 모든 분쟁을 중재하고, 여러 나라 간의 평화협정을 공고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아테네가 메가라 인들을 축출하기로 한 법령을 파기하고 그들과 화해하기로 하였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전쟁은 오로지 페리클레스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스파르타 왕의 중재안에 심히 반대하고 국민들을 부추겨 메가라 인들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2> 김병철 역. p.95-6)


[3]

메가라는 무역의 거점이며, 지역 주민은 배를 이용하거나 인근 폴리스에 무기를 제공하던 도시국가였다. 메가라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탈퇴는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는 계기들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후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갈무리한 삼십년 평화조약을 계기로, 메가라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다시 복귀한다. 하지만, 메가라와 아테네의 경제를 둘러싼 메가라 법령을 비롯한 일련의 조치들은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촉발시키게 된다.


[4]

크리톤, 정말이지 그들의 말은 진리라기보다는 그럴듯한 모습을 하고 있지. 사실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지. 사람이 되었든 다른 어떤 것이 되었든 어떤 둘의 중간에 있으면서 그 둘 다에 관여하는 것들은 그 둘로 이뤄지게 되는데, 그 둘이 각기 좋은 것과 나쁜 것일 경우에는 그 둘 중 어느 하나보다는 더 낫고 다른 하나보다는 더 나쁘게 되고, 그 둘이 좋긴 하되, 그 좋음이 동일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닐 경우에 그것(양쪽에 관여하는 사람이나 사물들)은 자신을 구성하는 저것들 각각이 유용하게 쓰이는 것에 대하여 둘 다 보다 더 나쁘게 되며, 그 둘이 동일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나쁜 것일 경우에 그것들의 중간에 있는 것들만이 자신들이 부분적으로 관여하는 그 둘 각각보다 낫다는 사실말이지. 그래서 만약 철학과 정치적 활동이 좋은 것이긴 하되 각각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 좋은 것이라면, 이 사람들은 이 둘 다의 중간에서 둘 다에 관여하기 때문에 이들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고, 만약 그 둘이 각기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면 한쪽 사람들보다는 더 낫고, 다른 한쪽 사람들보다는 더 나쁘겠지. 반면에 둘 다가 나쁜 것이라면, 그 경우에 그들은 뭔가 참된 것을 말하기는 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네. 그러니 내 생각에 그들은 둘 다가 그 자체로 나쁘다는 데 동의하지도 않을 것이고 한쪽은 나쁜 것이고 다른 쪽은 좋은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도 않을 것이네. 하지만 둘 다에 관여하는 이 사람들은 정치술과 철학이 말해볼 만한 가치를 보이는 각각의 분야에 대해서 실제로는 둘 다 보다 못하고 사실상 세 번째면서도 첫 번째인 것으로 보이려 애쓰지. (<에우튀데모스> 김주일 역. P.110)


[5]

하지만 그들의 욕망에 대해서는 그들을 이해해주어야 하고 화내서는 안 되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는 생각해야 하지만 말이지. 왜냐하면 분별에 관련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하고 용기있게 나서서 싸우며 공들이는 사람은 그게 누가 되었든 그 모든 사람을 아껴야 하기 때문일세 (<에우튀데모스> 김주일 역. P.111)


<읽은 문헌>

- 아이작 아시모프, <파운데이션 3 : 제2파운데이션> (김옥수 역. 황금가지)

- 플라톤, <메넥세노스> (이정호 역. 아카넷)

- 플라톤, <에우튀데모스> (김주일 역. 아카넷)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크 영웅전 2> (김병철 역. 범우사)

- 박성우. “플라톤의 <메네크세노스>와 아테네 제국의 정체성, 그리고 플라톤적 정치적 삶.” 『한국정치학회보』 41집 4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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