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습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속 조제가 읽던 프랑수와 사강(Françoise Sagan)의 <한달 후, 일년 후>. 이미 영화 자체에서 소설 속 조제의 의의를 십분 다루는 바, 영화 자체에 대한 무수한 헌사를 뒤로 한 채, <한달 후, 일년 후>에 나오는 다른 등장인물들(야망 있는 배우 베아트리스, 출세가도에 올려줄 졸리오, 신실한 에두아르)을 보고, 문득 든 생각에 써내려 보고자 한다.
소략하게나마 세 인물에 대해 정리하자면, 이들은 출판사에 다니는 알랭 말리그라스와의 인연으로 묶이게 된다. 알랭은 젊고 아름다운 무명배우 베아트리스를 사모하고, 에두아르는 알랭의 조카이며, 졸리오는 알랭의 친구이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알랭을 사랑하지 않으며, 에두아르의 소박함을 즐기고자 (또는 자신의 편의에 치중한 마음 씀씀이로) '플라토닉한 사랑'을 영위한다. 이후 예술계에서 '눈길을 끄는' 연극 연출가 졸리오의 사랑스러운 무심함 앞에서 에두아르에 대한 베아트리스의 사랑(이자 자극)은 빛을 잃어갔다.
물론 빈정거리기 좋아하고, 위험하고, 눈부신 졸리오와, 상냥하고, 아름답고, 몽상적인 에두아르 사이에서 베아트리스는 권력과 사랑에 사로잡힌 일련의 상황에 열광했다. 베아트리스는 에두아르와 함께 있을 때 세상일에 조금 흥미를 잃은 팜므파탈(femme fatale) 역할을 기꺼이 연기한 반면, 졸리오와 함께 있을 때는 열광하는 어린아이의 역할을 연기했다. 그녀는 그 역할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녀는 '순전히' 직업적인 이유로 졸리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마음을 정하게 된다. 그리고 졸리오에게 베아트리스를 정복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아쉽지만 순전(純全)이라는 단어 속에 순수한 마음이라 면피할 수 없다. 순전히라는 건 오로지. 즉, 그 하나뿐이었음을 반증한다. 일과 사랑, 사랑과 일. 딜레마를 이원화시킨 그녀의 선택을 지적하고 힐난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일과 사랑이 엮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일을 인질로 사랑을 기만하도록 놔둬서는 안 되고, 사랑을 담보로 일에 합리화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라라랜드> 속에서 세바스찬과 미아가 서로의 사랑과 일을 응원하고 각자의 세상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어디까지나 서로의 일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이, 분절적이지 아니하다는 것을 인지한 사랑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한편 <라라랜드>도 어디까지나 라라랜드라 전제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영화처럼 셉과 미아의 자급자족과 행운에 의한 인생역전으로만 엮여지지 않으니 말이다. (당연히 이러한 인생이 일절 없다고 원용하는 것이 아니다)
세바스찬 또한 일과 명성에 대한 만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랑하기에 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미아가 셉이 간절히 필요한 타이밍(이자 언젠가 확정적으로 다가올 이벤트)에 그는 안온했다. 어쩌면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이 정말 피하지 못한 건 러닝타임일지도 모르겠다.
일과 사랑을 분절해서 보는 순간, 둘 간의 손익을 계산하게 되며 그 의미는 퇴색되기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연인관계에서 그 의미는 스스로 빛을 내게 두어야만 한다. 이를 빛내기 위해 서로가 가꿔줘야만 한다. 구태여 말로 사랑을 설명하고 소명하면 그 위대함은 사그라질 뿐이다.
특히 허영과 욕망과 탐욕이 사랑과 엮이는 순간 그 말로는 파멸적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이 일에서 촉발된 것이라면 더 자극적이고 극적이게 다가오지 않을까? 명성이란 한 번에 폭발하지 않고 서서히 퍼져나간다. 탐욕 또한 마찬가지다. 한 번의 폭발에 익숙해지는 순간, 그 자극은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기본값으로 고정된다.
그렇다면 허영과 탐욕을 채워주면서 사랑을 추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쉽지만 인생은 모든 것을 다 만족하면서 살 수 없다. 전자만을 채워주는 자는 당연히 수혜자가 이를 어떠한 형태로든 채워주길 바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격체를 원하는 게 아니라, 추종자(fan)를 원한 베아트리스는 결국, 그녀를 비인격적이고 팬을 자처하도록 종용하는 졸리오와 이어질수밖에 없던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달 후, 일년 후>의 조제처럼 허영과 탐욕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재물이 넉넉한 상태는 이 딜레마를 해소해 줄까? 오히려 자신이 무익한 존재라는 사실에 권태로움을 느끼며,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권태로움을 해소해 줄 누군가의 역동성에게 귀의하고자 할 것이다.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 속 전동 휠체어를 사자는 츠네오의 제의에 반문하는 조제처럼 말이다.
진정한 사랑을 희구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의미로 모든 것을 아웃소싱해 버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 속에서 역설적으로 무력감만 느끼게 된다.
권력과 사랑 사이에서 오는 황홀한 삶에 사로잡힌 채, 선택하기도 전에 사랑이 멀어지는 순간, 갈 곳 잃은 사랑은 허영과 탐욕과 엮여, 내가 정말 무엇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인지적 코마상태'에 도달한다. 나만의 선택을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아니게 된다.
오직 자신의 일이 목적달성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만 잠시나마 구제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한달 후, 일년 후>의 배우를 위해 자신의 야망을 불태우는 베아트리스와 이를 즐겁게 바라보는 졸리오, 그리고 신실했던 에두아르의 관계처럼.
단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와 상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졸리오는 감상적이 되었다. 베아트리스가 연극을 하기 위해, 그녀 자신의 자그마하고 맹렬한 야망을 이루기 위해 그의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성공에 대한 그 집착은 존재들의 거대한 서커스 속에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졸리오는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는 것이었다.
'그건 다 허영이야, 귀여운 베아트리스, 요즘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노력 말이야....'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그건 정말이지 사실이에요. 우리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죠. 다행히도 우리가 자주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
。
。
。
베아트리스는 졸리오에게 주방이 어디인지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가 방에서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깨가 조금 좁고, 태도는 지나치게 활기찼다. 순간 그녀는 에두아르의 길고 굴곡이 있는 육체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유감스럽게 여겼다. 그녀는 그가 여기에 있었으면 했다. 누구든 상관없으니 오늘 밤의 성공에 대해 경탄해 줄, 혹은 재미있는 익살극에서처럼 그녀와 함께 오늘 밤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깔깔 웃어줄 아주 젊은 남자가 있었으면 했다. 누군가가 이 모든 것에 생명력을 부여해주었으면 했다. 여기엔 졸리오 그리고 그의 빈정거리는 평가뿐이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오늘 밤을 보내야 했다.
그녀는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고, 갑자기 자신이 연약하고 아주 어리게 느껴졌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멋지다고 희미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졸리오가 돌아왔다. 다행히도 베아트리스는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지 않고 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한밤중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연회의 기억이 곧바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커튼이 올라가던 그 삼 분간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 그녀는 관객석을 향해 몸을 돌렸고, 자신의 몸을 조금 움직임으로써 상당히 중요한 어떤 것을 잃어버렸고 넘겼고 넘어섰다.
그 삼 분은 이제 매일 밤 그녀에게 속할 터였다. 그녀는 그 삼 분이 그녀의 존재 전체에서 진정한 유일한 순간이 될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운명임을 막연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녀는 '평화롭게' 다시 잠이 들었다.
프랑수와즈 사강 著 <한달 후, 일년 후> 中
F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