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점과 평, 부연과 잡설
어쩔 수가 없다 (2025)
평점: 7/10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평: 아이스퀼로스의 이피게네아를 죽이는 아가멤논을 죽이는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이는 오레스테스 3부작과,
박찬욱식 오레스테스와 이피게네아를 위해 출정하는 아가멤논을 구원해 주는 클리타임네스트라를 구원하는 오레스테스와 이피게네아
이자, 아가멤논이 출정식에 딸을 제물로 안 바치고 첼로 영재교육 시키면 벌어지는 일
어쩌면 난 미국 가서 <미키17>만든 봉준호보다 난 더 한국적인 감독이다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메리칸 뷰티>가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홧김에 발치하고 살인사건에 연루되지 않는 유만수에게서 <오발탄>과 <살인자0난감>이 생각난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와 김창완의 <그래, 걷자>와 같은 노래 선곡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여러모로 박찬욱은 봉준호를 의식하지 않았으면도, 의식했구나를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선과 각도로 대립관계를 제시하던 봉준호의 <기생충>과 달리, 박찬욱의 <어쩔 수가 없다> 색깔을 데칼코마니같이 활용해 대립관계를 제시한다. 한 장면에 다 담으려던 기생충과 달리, 시간의 흐름을 담으려던 것도 차별점이라면 차별점이었다.
인디언 복장의 손예원과 유연석에게서 인디언 모자를 쓴 <기생충>의 클라이맥스 장면도 떠올랐다.
한편, 이만큼의 주연급 배우들을 많이 집어넣었음에도, 모든 스토리가 유만수(이병헌) 위주로 흘러간 점에 사뭇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영화 속에서 철을 활용해 분재하듯, 나무를 조여주고 꺾어주는 과정 속에서 전달하고 싶은 사안만 남기다 보니, 이러한 아쉬움이 생겼으리라 생각된다.
그 많은 주연급 배우들의 이야기를 함께 넣으면, 박찬욱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너무나도 산발되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유만수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경위와 과정들을 풀어나간다.
'어쩔 수 없이' 행동하게 된다면, 유만수의 행적을 위주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으며, 그의 가족들의 구원과 죄지음, 그리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더 감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오레스테스 3부작 또한 아가멤논, 클리타임네스트라, 오레스테스의 이야기에 방점이 찍힌 채 풀어나가며, 영화 속에서 유만수, 이미리(손예진), 유만수의 아들 유시원 (김우승)이 사건의 중심축으로 회전하고 있음을 인지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구범모(이성민)의 집안 이야기를 세부적으로 보여주고, 구범모의 대화를 엿들은 유만수가 이미리에게 엇비슷하게 말하는 과정은 일이라는 현장에 나온 사람들의 삶의 양태가 거의 엇비슷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들어갔지 않았을까?
오진호(유연석)과 이미리의 테니스장에서부터의 미묘한 흐름과, 재취업해야 한다 되뇌는 이병헌과 테니스장의 이미리와 오진호를 교차해서 보여주는 장면에서 이 셋의 관계를 묵시적으로 암시했다고 생각한다.
구태여 이미리가 오진호(유연석)와 외도를 했는지 아닌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주거나, 고시조(차승원)의 삶이 어떠했고 딸의 사연까지 들어가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유만수의 선택의 전달력이 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미리가 외도를 했다는 점을 보여줬다면 <헤어질 결심>과 뭐가 다르지?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어쩔 수 없는' 그의 선택과 '어쩔 수 없이' 그를 고용하게 되는 AI시대의 회사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다시 내몰게 될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그는 다시 '어쩔 수 없게' 취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연 '어쩔 수 없는' 선택 속에서 "어쩔 수 없다"만 되뇌게 되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 살기를 바라던 이피게네아[유리원(최소율)]이 독립된 개인을 너머, 독립된 가족으로 만들어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실업한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실업한 이후의 태도가 문제라던 이아라(염혜란)의 외침이 유만수에게 먼저 닿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미리와의 균열된 사랑과 신뢰로 인해 딸에게 더 집착하는 유만수를 만나게될지도 모르겠다. (이 또한 <올드보이>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올드보이 박찬욱이 재치 넘치는 올드맨이 되어 다시 인사하는 것만 같은 영화다.
불안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게 되고, 그 때문에 그토록 증오심을 보이게 만든다. 토인비의 역사관처럼 도전과 응전의 대쌍적인 서사만을 생각하게 되면, 운명에 도덕적 정당성이 매몰돼버려 내면의 충동과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의무의 명령에 스스로 복종하게 돼버린다. 방해물은 곧 악한 것이고, 누군가의 파국과 참극으로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어떤 질서가 이 의무를 보증하는지에 대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은 곧, 고질적(이자 근원적)인 공허감을 남기게 된다.
오직 자신의 의무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부여되는 것이기에,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규범적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지한 채, 필연을 깨닫고 수용하며, 성공/실패의 귀결로 의무를 도구화하지 않은 채, 목적을 지향한 채 그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어쩔 수가 없다'에 '왜 어쩔 수밖에 없었냐'고 볼멘소리 하기보단 '어떻게 하겠다'를 바라며
F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