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À Paris
자본주의 시대에 우리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방법
내가 교환학생으로 있었던 '파리'는 명품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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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왜 명품의 도시일까? '파리의 열두 풍경'을 읽으며 알게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려한다.
명품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는 명품 지갑이나 명품백은 사치품이라는 의미가 더 맞는 것 같다.
명품 :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하고 가격이 아주 비싼 상표의 제품.
사치품 : 분수에 지나치거나 생활의 필요 정도에 넘치는 물품. -국어사전
영어로는 'luxury goods'라고 한다.
Luxury goods are things which are not necessary,
but which give you pleasure or make your life more comfortable.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즐거움을 주거나 삶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상품.
언제부터 사치품?
루이 14세를 불어로 읽으면 '루이꺄토즈'다.
루이꺄토즈는 프랑스의 유명 사치품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다. 어쩐지 루이꺄토즈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한국 명품 브랜드 이름을 세종대왕으로 짓는다면 좀 어색한 느낌이 든다. 루이 14세가 명품 브랜드의 이름이 된 스토리는 무엇일까? 그가 루브르에서 베르사유로 왕궁을 옮기고 난 후 영위한 생활을 들여다보자.
1862년 그가 왕궁을 옮긴 이유 중 하나는 파리 시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데모를 많이 하는 서울대를 도심에서 관악산 아래로 옮긴 것과 비슷한 이유로 루이 14세는 우리나라의 청와대 같은 장소를 교외로 옮긴 셈이다.)
그가 베르사유로 이사한 또 다른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궁전을 만들어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루이 14세는 지방의 영주들에게 매년 일정 기간을 베르사유에서 보내도록 강요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귀족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감시할 수 있었고 권력의 중심지를 파리에서 외곽의 베르사유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베르사유궁에 있는 350여 개의 방은 대부분 왕족이나 지방 영주 등 귀족의 거처를 위한 시설이었다. 물론 부유한 귀족들은 왕궁 밖에 자신이 지낼 저택을 짓고 베르사유궁의 방은 옷을 갈아입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베르사유 궁에 모인 귀족들은 음악과 연극을 감상하고 매일같이 파티를 했다.
이 호화스러운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귀족들은 화장과 가발, 의상에 엄청난 돈을 낭비하였다. 유럽 각지의 왕족과 귀족들이 베르사유를 방문하였고 베르사유 궁전의 문화가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곧 사치품 문화가 유럽 전역에 자리 잡게 된다. 이렇듯 명품 문화는 루이 14세가 만든 아름다운 궁전에서 시작되었다. 궁 내부의 장식도 이전보다 화려해졌는데, 거울의 방을 만든 프랑스 제1의 유리 회사 생고뱅 SaintGobain도 이 시기에 세워졌다.
당신은 부르주아입니까?
부르주아의 부르 bourg는 '도시'를 의미한다. '부르에 사는 사람'인 부르주아는 '도시민'이다.
반대로 농촌사회에는 귀족과 농민으로 구성되는데 도시민은 이 두 계급과 각각 대립한다.
도시민 VS 농촌(귀족 + 농민)
도시민은 전통적으로 농촌사회와 다른 가치관을 갖는다.
부르주아는 도시에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예의범절에 익숙하다. 농민은 자연스러움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부르주아의 입장에서 보면 농민은 천박하고 저급하다. 반면 농민이 보기에 부르주아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존재다. 또한 귀족은 명예를 최고의 가치라 생각하며 혈통을 중시하는 반면 부르주아는 재산과 이익을 중시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부자일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지만 도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독특한 에토스 ethos를 보유한다. 부르주아는 귀족의 특권이나 허세를 싫어하고 동시에 농민의 무지와 천박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양면적 특징 때문에 부르주아는 왕이나 귀족에 대해서는 혁명적 성향을 드러내지만, 농민이나 노동자에 대해서는 차별성을 강조하는 보수적 입장이 된다.
부르주아의 도시가 된 파리
17세기 후반, 왕과 귀족이 베르사유로 옮겨간 뒤 파리는 서서히 부르주아의 도시가 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의 파리 건물들은 도시가 귀족에서 '부르주아' 중심으로 변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은 현재 프랑스 대통령이 거주하고 집무를 보는 엘리제궁이다. 이 곳은 1722년 에르뵈Evreux백작을 위해 지어진 저택이다. 거대한 파티를 열 수 있는 공간과 많은 방들이 만들어진 이런 귀족 저택은 오늘날 관공서나 학교 등의 건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총리실로 사용되는 마티뇽 궁도 18세기 마티뇽 백작이 아들에게 선물로 지어준 건물이다.
왼쪽 사진은 귀족이 떠난 후인 19세기에 지어진 오스만식 부르주아 아파트다. 오늘날 우리가 파리를 가면 볼 수 있는 건물이다. 6,7층 높이의 부르주아 아파트는 귀족의 오텔보다 다소 초라하지만 실용적이다. 부르주아는 이런 건물의 3층이나 4층에 산다. 밖에서 보아도 가장 좋은 층은 3,4층으로 천장이 높고 장식이 화려하다. 2층이나 5,6층에는 노동자 계급이 살고 밑 꼭대기층에는 하녀 방이라 부르는 작은 원룸들이 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한 건물 안에서도 사람들의 계급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브랜드를 내세우는 명품이란 결국 무엇인가. 귀족은 오텔을 지었지만 부르주아는 아파트 건물을 지어 좋은 층에 사는 것으로 만족했다. 마찬가지로 귀족은 자신만을 위해 옷과 장식을 만들게 했지만. 부르주아는 대량 생산되지만 값비싼 명품으로 계급적 차별성을 드러냈다.
명품 산업이 발달한 도시, 파리
파리는 부르주아로 인해 자연스럽게 명품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원래 명품이란 왕족이나 귀족을 위한 다양한 의복, 보석, 모자 , 가발, 액세서리 등에서 비롯된다. 부르주아는 왕이나 귀족만큼 엄청난 부를 보유하거나 소비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생활양식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을 노동자(혹은 농민)들과 차별화하려 했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명품의 가치나 화려함은 줄어들었지만 부르주아의 소비 계층이 늘어남으로써 파리는 명품 산업이 발달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했다.
중세 신분 사회에서 '계급'은 겉으로 드러나며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계급이 정말로 사라진건 아닌 듯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 그렇다면 신분 상승은 가능한 것 일까. '돈'의 가치가 급부상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가 신분을 상승시켜 주기도 한다. 특히 사치품 소비는 신분 상승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형상화'한다.
19세기의 파리나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에서나, 인간은 남들과 다름을 원한다. 차별성은 인간의 본능이고 사치품 소비는 우리의 본능을 충족시켜주는 한 가지의 방편이다. 다행히도, 차별성은 드러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즉, 사치품 소비가 차별성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참고도서
파리의 열두 풍경 - 조홍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