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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딸 May 29. 2019

파리의 로맨틱한 에펠탑

파리에서, À Paris

Bonjour, 프랑스 인사법

       비쥬(Bijou)는 볼끼리 터치하는 프랑스식 인사법이다. 비쥬를 처음 했을 때,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내가 정말 비쥬를 처음 해보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볼을 비빈다는 것, 우리 문화권에서는 생소한 스킵십이지만 비쥬를 하는 순간엔 어떤 어색함도 없었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비쥬가 이렇게나 자연스러울 수 있다니! 게다가 로맨틱해 보이며 어딘가 애틋한 느낌도 들었다. 


       프랑스에는 로맨틱한 인사법 비쥬와 함께 로맨틱하게 인사를 하는 건축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파리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에펠탑이다. 터키 대통령이 왔을 때는 터키의 옷을 입었고, 한불수교 130주년에는 한글을 새겨놓았다. 말 그대로 환하게 인사를 하고 있다. 에펠탑은 도시 가운데 위풍당당하게 솟아있어서 파리 어디에서나 그 빛을 볼 수 있다. 에펠탑에는 모두를 환대하는 넓은 아우라가 드리워져있다.  


에펠탑은 무엇으로 활용되나?

     에펠탑은 세계 유료 기념물 중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은 구경거리로 엄청난 관광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 실용성에 있어서도 뒤지지 않는다. 전신, 정보 등의 기술을 적용하는 안테나로 활용되며 전파를 탐지하거나 라디오 방송을 하는 용도로 쓰인다. 일기예보를 위한 관측대도 있다.

 


    사실 에펠탑이 처음부터 이런 역할들을 했던 것은 아니다.  1889년 만국박람회의 입구로 이용하기 위해서 세워진 에펠탑은 프랑스의 선진 과학과 기술을 자랑하기 위한 상징물이었고 실용성 없어 20년 동안만 그 자리에 세워졌다가 철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지금까지 남아 파리의 상징이 되고 있다.





선진 과학 기술, 철 구조물

  


구스타프 에펠의 철탑과 쥘 부르데의 등대

          '돌'이 주된 건축재료였던 19세기 ‘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건축사의 전환점이 된다. 철이 새로운 재료는 아니지만, 개량된 철 기술 덕분에 더욱 얇고 강한 구조물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건물 내부에 기둥을 최소화한 거대 건축물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프랑스는 만국박람회에서 전 세계가 놀랄만한 어마어마한 입구를 만들어 선보이려 했다.

        만국박람회가 열린 1889년은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대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박람회였던 만큼 입구로 이용될 철탑 공모전에 수많은 예술가와 엔지니어들이 참가했다. 이 공모전의 승자는 높이가 300미터가 넘는 철 구조물을 그려 낸 유명 교량 엔지니어 구스타프 에펠로 결정되었다. 당시 에펠의 작품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작품은 쥘 부르데의 작품이었는데, 그는 300미터짜리 돌로 된 등대를 세우고자 했었다. 하지만 이는 철탑만큼 혁신적이지 않았고 결국 '에펠탑'이 최종 당선된 것이다.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

       에펠탑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 순간부터 여론의 거센 반발은 끊이지 않았다. 권위 있는 안티들에게 당당하게 맞선 구스타프 에펠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1887년 2월 14일, 프랑스 일간지 <르탕Le Temps>의 지면에 실린 내용이다.

 “공장 굴뚝을 닮아 현기증 나게 우스운 그 흉물은 우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생트샤펠 성당, 생자크 탑, 루브르 박물관, 앵발리드 관, 그리고 개선문을 움츠러들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얼룩 같은 그림자를 앞으로 20년간 봐야만 한다.” - 건축가 샤를 가 르니에, 극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등을 포함한 당대 지식인과 예술가 50명의 반대 서명


     그러나 에펠은 이를 반박하며 ‘구시대적 전통이 지금의 시대적 과제와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동일 지면에 게재하였다. 그리고 거센 여론을 무릅쓰고 공사를 진행한다.


        에펠탑이 완공되고 난 후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좋지 않았다. 프랑스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은 에펠탑 안에 서 점심 먹는 이유를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에펠탑이 철거될까 봐 두려워했던 에펠은 이 탑이 관광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 얼마나 유용한 시설인지를 강조하며 안테나, 라디오 등 실용적인 용도로 쓰일만한 것들을 넣기 시작했다. 그는 1923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는 에펠탑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사라진 뒤다. 그는 미래를 보는 눈이 있었던 것 일까?





구스타브 에펠에게는 아이디어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사실 에펠은 설계 사무소의 CEO였을 뿐, 실제로 박람회장 입구에 300미터짜리 개선문을 세운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은 에밀 누기에였다. 공모전이 열렸을 때 회사 사장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안의 특허를 사서 설계자인 스테펭 소베스트르의 이름과 함께 제출하였다. 이로써 이 탑은 에펠탑이 된 것이다! 그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알아보고 이를 구현해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예로 프랑스 중부의 캉탈 지방에 에펠이 시공한 가라비 철교를 들 수 있는데, 지금처럼 공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대에 강을 120미터 높이에서 가로지르는 엄청난 규모의 이 다리는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이 역시 역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엔지니어 레옹 보이에가 냈던 아이디어를 에펠이 실현시킨 것이다.



         프랑스의 유명 건축물 뒤에는 엄청난 애정을 가진 인물이 한 명씩은 있는 것 같다. 베르사유엔 루이 14세가, 퐁피두에는 퐁피두 대통령이. 에펠탑이 계속 남아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다른 용도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한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에펠이 임종 시에 마지막으로 했던 유언마저 정말 에펠답다. "에펠탑을 정기적으로 색칠해 달라. 녹슬지 않도록..."

         파리 시는 지금도 이 유언을 굳게 지키고 있다. 25명의 기술자로 이루어진 도장팀을 따로 운영하여 에펠탑을 수시로 보수하고, 때로는 1년 6개월에 걸쳐 전체를 칠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애정이 스며든 에펠탑의 빛은

하루도 빠짐없이 파리의 곳곳을 비춘다.


파리가 로맨틱하게 느껴진다면
구스타브 에펠의 애정을 느낀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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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열두 풍경 - 조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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