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 소리에 채 눈을 뜨지도 못하고 겨우 일어났다. 창문을 여니 아직 밖은 캄캄하다. 아니 여느 때보다 캄캄한 것이 잔뜩 낀 시커먼 비구름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유독 잠이 빨리 깨지 않는다. 열린 창문으로 비릿한 흙냄새가 바람에 훅 들어온다. 초록이들이 좋아하는 바람이다. 이 초록이들을 얼른 깨우려 식물등을 켠다. 이렇게 흐리다 못해 깜깜한 날엔 해가 짧아지기 전에 식물등을 마련해 놓은 것이 뿌듯해진다.
처음엔 화분을 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가 거의 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부터 시작해 앞집 거실 조망의 북서향 빌라와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오피스텔을 거쳐오는 동안 손이 가지 않는다던 작은 화분도 항상 며칠을 가지 못하고 늘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그 후엔 항상 바싹 말라 조금만 스쳐도 날리는 흙과 거뭇하게 말라비틀어진 초록이의 사체들 때문에 너저분한 것들은 보기에도 힘들었다. 게다가 흙은 어디다 버려야 할지 항상 난감해하며 무엇에 쓸지 모르는 화분만 덩그러니 남겨지곤 했다. 그리고 그 화분을 어디에 분리수거할지를 고민하느라 세상 번거로웠다.
오피스텔 다음은 좁디좁은 원룸형 아파트였는데 세탁기며 각종 짐들을 테트리스처럼 쌓고 구겨 넣어 창고처럼 쓰던 베란다가 좁은 탓에 햇볕은 딱 그만큼의 너비로 들어왔고 하루종일 형광등을 켜놓아야 하는 건 이전의 집들과 마찬가지였다. 아파트에서는 집을 제외한 나머지의 조건들이 모두 좋았기 때문에 1층에서 2년 살다가 7층으로 올라가 꽤 오래 살았다. 생각해 보면 같은 동, 같은 평수의 집이 차이 나는 건 햇볕 밖엔 없었고, 결국 임대료의 차이는 한낮에만 잠깐 드는 햇볕의 값이었던 것이었다.
손바닥 만한 햇볕을 즐기던 몇 해가 지나 집값은 천정부지로 미친 듯이 치솟았고, 집주인은 계약이 끝나가면서 집을 팔 계획을 내게 알려왔다. 나 또한 이 집에 대한 불편함도 커져갔기에 새로 집을 알아봐야 할 때가 다가왔다. 돈도 돈이었지만, 이제 내게 우선순위는 일조권이 되었다. 한낮에 잠깐 들기는 했지만, 여태껏 맛보지 못한 햇볕의 편안함을 너무 느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이사를 했다. 이번에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인 데다가 방이 하나 있고 거실이 딸려있는데 양쪽 모두 커다란 창이 있어 서향인데도 하루종일 환한 집이다. (일조권을 부르짖었지만 남향을 고집하지 못한 건 여전히 경제적 여건 때문 인건 안 비밀.) 물론 맞바람이 치지 않는 것은 조금 아쉽긴 해도 창이 방마다 있으니 이전보다 바람이 훨씬 더 잘 통하고 공간이 여유가 있다.
새로운 공간에 오니 이전 집들에서 쓰던 가구들을 그대로 가져왔는데도 못 보던 것들이라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 오래 묵은 짐 정리에 치를 떨었고 미니멀리즘을 실천하자고 생각만 한 게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 내어 말하기까지 한 덕분에 다소 단출해진 세간살이 덕분이었다.
잘 배치된 공간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고, 당분간 정 붙이고 살 곳이라, 인테리어를 위한 참고할 만한 웹사이트를 열심히 뒤져본다. 아뿔싸. 미니멀리즘으로 살려면 난 여기에서 만족했어야 했다. 눈길을 끄는 사진들엔 대부분 초록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넓고 높은 공간에 덩그렇게 놓인 형태만으로도 아름다움을 뽐내는 고가의 식물이 그것이었다.
집안을 깔끔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납과 정리를 위해 뭐든지 다 있는 상점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야 했다. 정말 없는 게 없는 다있소 상점의 한가운데 섹션에도 여지없이 초록이들이 있었다. 귀엽고 앙증맞은 다육식물부터 크고 화려한 잎의 여인초까지 종류도 많았다. 이전의 작고, 손이 덜 가는 화분들을 일찌감치 저세상의 초록별로 보낸 경력이 많은 나로선 망설여지는 선택지였지만,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내 손으로 크게 키워보리라고 덜컥 눈에 띄는 알로카시아 화분을 집어 들었다. 집까지 조심스레 들고 오느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지만, 가장 공들인 공간에 딱 올려놓으니 보기에 사뭇 흐뭇해졌다. 게다가 이전의 집들보다 환기도 잘 되고 훨씬 밝으니 잎이 커지고 새잎이 돋아나는 것이 눈에 보여 신이 났다.
신이 난 마음에 불꽃 부스터를 달게 된 것은 옆 사무실의 선배님이 물꽂이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었다. 웃자란 부분을 가위로 뚝 잘라 물에 담가만 두었는데도 뿌리를 내고 잎을 만들어내는 것은 나에게 신세계였다. 정점은 물에 담가두었던 식물이 뿌리를 내자 흙에 옮겨 심었고, 그로부터 새로운 잎들이 마구 솟아나고 꽃도 핀 것이다. 화수분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그로부터 본격적으로 나의 정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하나둘씩 우리 집 창가는 초록색으로 변해갔다. 산책을 하면서도 지나는 길에 꽃집이 있으면 꼭 들어가서 구경이라도 하고 나왔고 가끔은 손에 들린 화분이 있었다. 원예와 관련된 강좌나 원데이클래스를 열심히 찾아서 듣고 화분을 얻기도 하고, 가끔 누군가가 나눔 한다고 하면 저도 손들어도 될까요 하고 여쭤본다. 중고거래 사이트에도 여러 번 드나들어 분류에 식물 카테고리가 있는 걸 알고는 이제 매너온도가 꽤 따뜻한 이용자가 되었다.
창가의 식물들은 이제 새로운 잎들을 무수히 만들어내고 그들을 가지 쳐서 새로운 개체를 또 만들어낸다. 새로운 초록이들은 마음 가는 친구에게 하나씩 하나씩 선물도 한다. 그렇게 해도 하나둘씩 늘어난 화분들은 이제는 바닥에는 늘어놓을 데가 없어서 책꽂이가 화분 거치대로 변신해 간다. 한쪽 창가에만 놓여있던 초록이들은 창가를 모두 점령하고 가장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을 차지했고, 여름엔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직사광선에 탈까 시들어 버릴까 커튼으로 차광을 하기도 하고, 너무 덥고 습한 기운에 나도 쪄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땐 아무도 없는 실내에 냉방도 해본다. 겨울엔 난방을 하면 너무 건조해 말라죽을까, 가습기와 팬을 동원해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려 애쓰고, 창문 가까이는 너무 찬 기운에 얼어 죽을까 하여 난방도 적당히 발 시리지 않을 정도로만 하고, 비실거리는 것 같으면, 책도 보고, 유튜브도 찾아보며 공부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하나도 번거롭지 않고 오히려 즐겁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 한 잔 홀짝 거리며, 이들을 바라보는 일이 왜 이리도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편해지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잠깐의 시간이 내게는 더없이 소중해졌다. 자고 일어났더니 피어있는 마란타의 작고 여린 보라꽃, 작아도 향기는 멀리 가는 오렌지재스민, 하루가 다르게 뻗어 나와 징그럽긴 하지만 대단한 생명력을 마음껏 표현하는 몬스테라의 괴근, 하늘하늘하고 가느다란 잎과 줄기로 애를 태우는 프테리스, 먹고 버리려던 단단한 씨앗에서 솟아오른 아보카도의 신기한 줄기와 잎. 내게 가까이 있는 이 식물들이 나에게 생명력과 삶의 신비를 바로 보여주어서 더 큰 감동과 감흥으로 다가온다.
초록이들은 나에게 세상에 관한 더 큰 시선을 선물했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자라는 생명력과 끈기를, 환경에 반응하며 고통과 아픔, 아름다움과 향기를 표현하는 삶 자체를 감사히 여기게 된다. 계절을 즐기며, 새로운 잎사귀와 익어가는 열매로 보여주는 노력과 과정을 생각하게 하고, 햇볕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과 달라지는 잎의 방향, 이런 것들을 보며, 나의 삶에 빗대어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마음에 담기는 초록이들을 그려내게 되고, 그 순간의 꽃을 사랑하게 되면서 버려지고 땅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적어지게 된다. 흙을 가까이하며, 땅에서 오는 것들을 일구기 위한 수고를 알게 한다. 풍요로운 바람을 느끼고, 햇볕에 반짝이는 초록이들을 볼 땐 아름다운 악기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그들이 내어주는 것에 감사하며, 맛있게 요리하고 싶어지고, 남겨지는 것에 대한 생각으로 주변을 정리하면서, 환경을 아끼고 나의 삶에 적용하게 된다.
손바닥만큼의 크기에서 시작한 정원은 어느새 우리 집에서 가장 눈에 들어올 정도로 커졌지만 만족할 수 없다. 나는 우리 집을 정원으로 만들 생각이다.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초록이들로 가득한 맥시멀리즘이지만 식물이라면 괜찮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