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시민대학의 글쓰기 강좌를 통해 이 소설을 읽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가 쓴 이 짧은 소설은 길이가 매우 짧아서, ’손바닥 장‘자를 쓰는 장편소설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특유의 아름다움 속에서 작가만의 감성을 닦아 독자적인 문학의 세계를 창조하며, 일본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하고 있는데, 대표작인 <설국>과 <고도> 등으로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메뚜기와 방울벌레>도 이야기를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어떤 사건으로 인한 드라마가 전개된다기보다 작가의 시선이 살피는 장면의 아름다운 묘사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게다가 방울벌레에 관해서도 처음 들어본지라 방울벌레가 메뚜기보다 아름다운지, 더 귀하게 여길 가치가 있는지 검색해 본다. 벌레의 생김새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모습인데, 소리를 들어봐야 소설의 아름다운 문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비혼을 고집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혼자 살고 있다. 주위 사람들도 요즘 사람들의 늦은 결혼과 출산을 감안하더라도 이미 많이 늦어버렸으니 이제는 한다는 말이 “그래, 혼자 살아. 속 썩을 일도 없고 좋지 뭐.” 하는 말로 위로하며, 남의 속은 모르는 말을 쏟아낸다. 그러고는 멋쩍은 듯 방울벌레 대신 메뚜기 잡았다며 서로의 짝꿍에 대한 실망과 아웅다웅 투닥거릴 일들로 가득 차 있는 현실생활을 한탄한다. 이런 결혼 생활에 큰 뜻도 없지만, 남의 속사정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에 진절머리가 난다.
며칠 전에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와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이런저런 가정사에 이제까지의 근황까지 길고 긴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누었다. 그 친구는 한 번의 이혼 후 미국에서 재혼하여 살고 있는데, 삶에 구름이 끼고 상처를 입어 진짜 방울벌레를 메뚜기라 생각했던 건지, 메뚜기 같은 남자를 만났어도 방울벌레라고 다시 믿고 사는 건지는 알 수 없다. 결혼을 두 번 해 본 입장에서 결혼이 진짜 필요하냐는 내 질문에 그 친구는 긴 침묵 끝에 “아니”라는 짧은 대답이 나온다. 그러니 서로를 방울벌레라고, 메뚜기라고 여기는 생각조차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소설의 끝에서는 서로의 몸에 비친 이름을 살피지 못하는 두 아이의 모습을 사뭇 안타까운 듯 바라본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그 장면을 의식할 수는 없어도 방울벌레와 메뚜기로 서로를 평가하고 바라보지도 않는다. 초롱의 불빛이 어른거리는 지나간 시절의 풋풋하고 설레는 기억이 없다면 그 대신 그들에게는 그들의 시절을 아름답게 하는 또 다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걸 지켜보는 ‘나’의 기억이 그들에게 없음을 안타까워할 게 아니라 내 어린 시절의 방울벌레와 초롱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게 더 나은 시간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