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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낯선 이의 다섯 번의 만남

기억

by 루시

two strangers who meet five times - 감독 Marcus Markou


모든 것에 ‘총량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나의 기억 용량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거기다 긍정적이고 좋은 기억은 나쁘고 부정적인 기억에 밀려 쉽게 사라진다. 그래서 말다툼을 할 때도 녹음을 한 것처럼 말 한마디 한마디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생각나고, 모든 상황들이 사진으로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어 즐겁고 행복한 감정보다 힘들고 어둡고 상처받은 감정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덧 1분도 채 지나지 않아도, 너무 멋진 말이라고 되뇌기까지 했어도, 다시 잊어버리기 전에 옮겨 적을라치면, 또 눈을 깜빡거리며 뭐라고 했더라? 하고 혀 끝에서 잘 생각나지 않는 단어만 맴돌고 있다. 나는 금붕어인가…… 좌절감이 든다. 지나버린 힘든 시간들에 내 기억력을 다 써버린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이제는 누군가를 언제 만났고 무슨 얘기를 했던가는 그 사람이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닌 담에야 기억날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그걸 다 세세하게 기억하는 게 그렇게 의미가 있을 리도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다면 또 다른 문제다. 내게도 영화 속 두 남자처럼 여러 번 마주치고 어떤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곧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생생하고도 아직도 따끔거리는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또 그와는 반대로 여러 번의 상처가 남은 기억을 뒤로하고 지금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들의 의미를 탐색하며 새로 시작하는 만남과 기억으로 남기고자 하는 선한 마음 또한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마음은 다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네 번째 만남에서 알리스테어는 다음의 행동을 보여준다. 사미르가 두 번째 만남을 기억하고 자신을 채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악감정이 없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사미르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지난 일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리한 요구가 아닌 보호소에 가기까지 남은 2주 간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힘든 상황에도 책을 계속 읽고, 나중을 위해 바나나를 남겼다. 그러니 알리스테어의 삶에 관한 긍정적인 모습은 그를 불쌍하게만 여기지 않게 만든다.


결국 나는 이 이야기를 나 자신에 관한 기억을 어떻게 남기겠느냐는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또 삶의 자세와 다른 이를 대하는 태도에 관련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내성적이고, 내향적이며, 다소 예민한 내가 쏟아지는 수많은 자극들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했지만, 30년에 가까운 사회생활과 직장생활을 통해 사회를 경험하고, 타인과 관계 맺기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난 후 얻게 된 나만의 보호막, 나만의 스펀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어떤 인간이었나를 떠올려 보고, 어떤 인간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를 더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겠다.

영화의 줄거리 : 두 번째 만남에서 알리스테어는 현금인출기 앞에서 사미르를 만나는데 천천히 현금을 인출하는 사미르에게 시비를 건다. 사미르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에 화가 났지만 싸우지 않고 자리를 뜬다. 이후 세 번째 만남에서는 알리스테어가 채용면접을 본 후 CEO를 만나는데 사미르가 그를 먼저 알아본다. 시간이 흘러 네 번째 만남에서 알리스테어는 노숙자가 되어 길거리에서 머물다 지나가던 사미르를 보고 말을 건넨다. 사미르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알리스테어는 사미르에 관한 것들을 기억해 내며 보호소에 가기 전 2주 동안 버틸 수 있도록 사미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사미르는 현금인출기를 찾아보겠다고 자리를 떠난다. 얼마 후에 다시 돌아온 사미르는 약간의 현금을 건네며 이것으로 둘의 만남을 처음으로 기억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후 시간이 더 많이 지나 사미르는 표현을 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고 많이 노쇠하여 도움이 많이 필요한 할아버지가 되어있다. 알리스테어는 자원봉사자로 사미르가 머무르는 시설에 왔는데 그런 사미르를 보고 만난 적이 있냐며 묻는다. 사미르는 말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듯 알리스테어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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