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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스타일 오거나이저

by 루시

모처럼 아침에 여유가 생겼다. 물론 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해서 생긴 여유다. 3월 한 달을 꼬박 일에 몰두하다 보니 내가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이었구나 수시로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따라오는 조바심과 조급함, 자꾸 떨어지는 집중력과 몰려오는 피로. 이런 것들에 시달리고 시달리는 날이 계속되니 눈에 피로가 쌓인다. 미적거리다 늦은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니 눈에 실핏줄이 터져 흰자가 벌겋다. 어쩐지… 자꾸 눈앞이 흐려지더라니…


가만히 턱을 내려놓고 멍 때리기를 15분, 집안 구석구석이 보이기 시작한다. 구석에 쌓여있는 먼지와 고개를 늘어뜨린 화초들, 쌓여있는 설거지거리와 쓰레기, 빨래통에서 넘치려고 하는 빨랫감들… 하아… 그래 이런 날 못했던 일 해야지 언제 하겠어. 회사에서도 남이 어질러놓고 쑤셔 박아 놓은 물건들 치우느라 징그럽지만, 그건 남의 것이고, 나는 내 집을 치우는데 에너지 쓰는 건 아까워하지 말자. 화분 아래에 떨어진 잎들 치우고 바닥도 닦고, 물도 흠뻑 흠뻑 화분받침에 흘러넘치도록 주고, 말라버린 잎 정리해주고 나니 벌써 점심 때다. 식탁은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밥을 할 기운은 없으니 냉동 주먹밥을 후루룩 데워 컵라면과 함께 흡입하고는 설거지를 후딱 해버린다. 식탁 위에 널브러진 책과 잡동사니들 제자리를 찾아준다.


밥을 먹었으니 이제 씻어야지. 양치질하다 세면대 옆을 내려다보니 화장실 바닥이…. 음… 양치질을 또 후딱 끝내고 수세미를 집어든다. 화장실 청소한 지가 언제더라… 화장실 구석에 던져놓았던 걸레를 정리하고 하수구에 걸린 머리카락과 먼지를 털어내느라 쭈그렸더니 세면대 아랫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이사 오고 나서 몇 년 만에 처음 보이는 데다. 세면대 윗부분만 닦았지 아래는 생각도 못했는데 한 사람의 흔적이 이렇게 곳곳에 남아있다. 들어올 때 입주청소를 하고 들어왔으니 전부 내가 남긴 흔적이며, 나의 생활습관이 고스란히 남겨진 것일 텐데, 그간 그전 집들 화장실에서 익히 보아왔고 외면했던 장면들이다. 전에 살던 사람들 흉을 보고, 오래된 집 타령을 하며 내가 남긴 흔적인지 몰랐던 게 부끄러워지는 시점이다. 화장실 바닥에 물건을 내려놓지 않아야 바닥이 깨끗한데 집이 좁으니 물건 놓을 데가 없다. 해서 보이는 공간에는 죄다 물건이 자리를 차지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먼지도 들어차게 된다. 화장실에 무슨 물건이 이리 많지? 화분갈이를 화장실에서 하다 보니 나중에 남게 되는 플라스틱 포트도 쌓여있고, 여기저기서 얻어온 제각각 모양의 화병들도 바닥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 1년을 사용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쓰지 않을 거라고 했지. 플라스틱 포트는 다시 그곳에 식물을 담을 일이 없으니 과감히 분리수거해 낼 수 있다. 유리화병은 가끔 꽃을 꽂으니 깨끗이 씻어서 사용하기 좋게 닦아놓는다. 진짜 코딱지만큼 작아서 변기만 있는 화장실은 아니지만 청소도구가 여러 개일 필요는 전혀 없는 화장실이니 거추장스러운 전동브러시는 당근에 내놓아야겠다. 이제 청소도구 수집은 그만하고 청소를 하자.


아무 생각 없이 실컷 치우고 깨끗해진 공간을 보니 뭔가 마음속에도 쌓여있던 찌꺼기가 조금은 사라진 듯하다. 말없이 씻어내는 행동에만 몰입하니 청소명상을 한 건가. 설거지와 청소를 하는 동영상 시청자가 그리도 많다는데 왜 그런지 조금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러니 조금 더 해볼까? 다음은 신발장이다. 발은 두 개라서 신발은 한 켤레만 신을 수 있는데도 신발은 정말 많다. 예전엔 신발을 참 좋아했다. 키가 작으니 힐이 높은 구두를 마음껏 신었더랬다. 발을 한 번 크게 다치고 나선 높은 굽 신발이 부담스럽고 발이 불편해졌다. 그렇지만, 전부 낮은 스니커즈와 플랫슈즈로 바꾸었어도 예전의 하이힐들을 버리진 못했다. 오래되었어도 차마 버리지 못한 것들도 많다. 한 번만 더 신고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진으로 남겨놓아야겠다. 전에 읽은 어느 글에서, 여성의 신발은 기본이 17켤레라고 했다. 검은색 구두라도 앞 코가 뾰족한 것, 둥근 것, 굽이 높은 것, 낮은 것, 장식이 있는 것, 없는 것, 끈을 매는 레이스업, 뒤꿈치에 고무줄이 있는 것, 뒤가 막힌 것, 슬링백, 발목에 올라오는 것, 종아리까지 오는 것, 무릎 아래까지 오는 것에, 발이 시리지 않게 털이 안에 있는 것, 샌들, 슬리퍼, 실내운동화, 등산화까지 다양하고 거기에 색깔만 하나 달라져도 개수는 금방 늘어난다. 그래, 발은 두 개지. 한 번에 한 켤레만 신을 수 있어. 대신 누가 안 신는다며 안겨줬지만 무거워 손이 가지 않던 운동화를 내놓는다. 다음엔 이젠 무릎이 시큰거려 신지 못하는 하이힐들도 영원히 안녕해야겠다. 내 발은 유난히 작아서 아무도 못 신는다. 하니 누구 줄 수도 없다. 내가 신는 동안 나를 즐겁게 해 줘서 고마우니 사진으로 남겨줄게.




무엇이든 항상 꽉 채워 살아왔다. 10분의 시간이라도 빈 시간이 있으면 뭔가를 하려고 했고, 조그만 공간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어떤 물건을 들여놓고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게다가 필요 없어진 물건도 버리지 못했다. 언젠가 쓰겠지 너무 멀쩡한데. 그래놓고는 잊어버리고 기억에서 사라졌는데, 여유와 공간도 같이 사라졌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버거워진다. 아등바등하며 몸부림치는 게 힘에 부친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뭐가 크게 달라지는 건 사실 없다. 물에 뜨려면 팔다리를 힘주어 움직이는 것보다 힘을 빼고 하늘을 보고 누워버리면 더 쉬운 것과 같은 것이니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나 스스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많은 것은 나의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다 관리할 수 없다면 줄이는 게 맞고, 개수를 줄이고 종류를 줄이면 에너지가 순환하고, 흐름이 생긴다.

나에겐 계속 너무 많은 것들이 있었다. 공간이 좁으면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알아차리고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좁은 공간 때문에 더 큰 공간을 소비하는 건 너무나 거대한 에너지와 내 수준에 맞지 않게 지나친 소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집에 막 들어왔을 때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들을 떠올려본다. 이젠 하나를 더하려면 두 개를 빼어버려야겠다. 아니 적어도 눈에 보이는 것 하나라도 빼야겠다. 안 보이는 데 숨겨놓았던 것들은 빼도 별로 표시도 안 난다. 어차피 있는 줄도 몰랐던 것들도 많다. 여기서도 나의 생활 흔적은 여실히 드러나는구나.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음식쓰레기 줄이기였다. 물론 음식쓰레기 치우는 일이 너무 싫고 끔찍해서였다. 사실 근본적인 이유는 음식을 사놓고 먹지 못해서거나 사놓고 잊어버려서, 있는 줄 모르고 또 샀거나 무료배송 금액에 맞추느라 지금 당당 필요하지도 않은 음식을 사서, 언제나 냉장고가 꽉 차 있어서다. 문제는 돈을 주고 음식을 사서 돈을 주고 음식물 쓰레기로 치운다는 거다. 게다가 상한 음식과 곧 먹어야 할 음식이 냉장고라는 밀폐된 공간에 공존한다는 거다. 그러니 당연히 늘 음식을 버리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몸에 좋은 음식을 신선한 상태로 먹을 것이고, 버리기 직전의 음식을 먹어치우며 살진 않겠다는 다짐을 또 해본다. 지금 먹지 못하는 음식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더 먹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다시 냉장고를 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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