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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종근 Sep 13. 2022

지키는 게 더 쉬웠어요

우울함이라는 감정을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발목까지 오는 물속에 누운 채로 잠겨있는 누군가의 모습. 정체 모를 절대자의 마지막 아량인 것처럼 눈코입만 수면 밖에서 잠길 듯 말 듯 한 모습. 고등학교 1학년, 음악실에서 당시 발매됐던 타블로의 ‘에어백’을 몰래 듣고 글로 옮겨 놓은 단상이다. 그때처럼 휘발될 감정이자 보관될 활자이지만 오늘은 끄집어내 쉽게 쓰일 글에 담아본다.


그때 기억이 또렷하다. 감히 헤아려보자면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독립 레이블도 운영을 중단하고, 하필 멤버들이 모두 군대에 있던 시기. 의혹은 의혹을 낳고, 알아듣게 설명해도 또 다른 심지에 불을 댕기며 목을 조르고. ‘열꽃’이 발매되기 한참 전부터 그래왔으니까 홀로 싸워온 기간이 꽤 길다. 떠들고 놀라고 만들어 놓은 게시판에서까지 팬들이 편을 갈라 진실게임을 벌이던 혼란한 시기, ‘이 사람 진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정말 매일같이 인터넷에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매번 다른 음악을 청중에게 들려줘야 한다는 뮤지션으로서의 소명 의식으로부터였는지, 실재하는 감정에서 나온 것인지 지금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전에 어떤 음악을 만들어왔는지 아니까 더 무섭기도 했다. 동시에 날마다 안도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열꽃’이 발매됐을 때도, ‘99’로 돌아왔을 때도 반가운 동시에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김이나 작사가의 말마따나 ‘인사이드 리릭스’에 타블로가 출연해서 ‘에어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는 게 신기했다. ‘열꽃’의 수록곡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콘서트에서도 웬만하면 부르지 않는 앨범이다. 더 짜낼 눈물도, 더 떨어질 바닥도 없는 밑바닥에서 만들어낸 ‘열꽃’의 수록곡 중에서도 그 앨범의 정체성이 담긴 곡에 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할 수 있는 때가 오긴 했구나. 에픽하이의 팬들이라면 대부분 잘 알 만한 내용이었음에도 새삼 생경했다. 운전을 못 하고 대중교통도 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탔던 택시, 한 명의 동승자뿐이고 그조차도 등을 돌리고 있어서 택했다는 이야기에 맘이 저리기도 했지만, 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작가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4집 느낌을 좀 내라’, ‘피처링이 많다’, 신보를 낼 때마다 맡겨 놓은 노래가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의 의견도 심심치 않게 보이고 들린다. 하지만 살아서 음악을 하고 글을 써주는 게 그냥 고맙다고 여기는 내게는 햇수로 20년을 채운 그들의 음악이 여전히 최고라고 생각한다.

 

I feel sorry for my fans

Loving me is hard

내 굴곡진 인생 함께 걷는 거니까

내가 밟은 땅만 꺼지는데

날 지키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쉬울 때

 

10집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 수록곡 Bleed의 가사 중 일부이다. 누군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거룩한 일이다. 열렬히 좋아했던 것들을 놓아버리는 일은 객체와의 단절을 넘어 겹쳐 있던 시간까지도 퇴색시켜 녹슬게 만든다. 그래서 관성처럼 기다렸고 묵묵히 지켜왔다. 애써서 버리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마음 편하니까. ‘연필깎이’의 가사처럼 좋은 날은 다시 올 테니까.


평화의 날’에 빠져 그 이름도 어려운 에픽하이를 좋아하게 됐던 그때. 뜻도 모르고 발음도 어려운 가사를 종합장에 옮겨적어 외던 그때부터 오랜만에 ‘열꽃’을 꺼내서 들어본 오늘까지도 여전히 같은 곳에서 같은 마음으로 다가올 만남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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