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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소리 Jan 03. 2021

달이 두 개인 세상으로 이주하다.

- 2018년의 다음 해는 2Q19년, 그리고 지금은 2Q21년

하늘에는 달이 두 개 떠 있었다. 작은 달과 큰 달. 그것이 나란히 하늘에 떠 있었다. 큰 쪽이 평소에 늘 보던 것이다. 보름달에 가까운 노란색이다. 하지만 그 곁에 또 하나, 다른 달이 있다. 눈에 익지 않은 모양의 달이다. 약간 일그러졌고 색도 옅은 이끼가 낀 것처럼 초록빛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시선에 포착되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중에서




"과거의 나는 죽었다. 나는 이제 새롭게 태어났어. 새 삶을 살 거야.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친구는 만주로 떠나는 독립투사처럼 자못 비장한 어조와 표정으로 나에게 보험 계약서를 내밀면서 비굴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녀석은 3년 전에도 '진짜 마지막'이라고 하며 회사를 옮겼고 그 5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고 살았던 친구는 최근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난 후 두 달 간의 칩거 생활 끝에 세상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사골곰탕 같은 맹세와 함께. 두 달간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환골탈태라도 했단 말인가? 결코 믿지 않았지만 보험회사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한 친구의 앞날을 형식적으로나마 격려하며 실적 한 건을 올려 주었다. 그러나 나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서 장담했다. 인간은 결코 과거와 완전히 결별할 수 없다. 과거로부터 탈출하려는 힘이 크면 클수록 허리에 용수철이 감긴 것처럼 결국 더 강한 속도로 과거로 회귀한다. 내 예상대로 결국 그 친구는 얼마 못 견디고 과거로 돌아갔다. 녀석의 마지막 회귀는 이것이 도대체 몇 번째일까?


하루키의 소설 '1Q84'에서 여주인공 아오마메는 수도고속도로의 비상계단을 통해 1Q84년으로 들어오게 된다. 1Q84년은 달이 두 개인 세상, 리틀피플이 공기번데기를 만드는 세상이다. 1984년과 닮았지만 묘하게 다르다. 1984년이 현실의 공간이라면 1Q84년은 현실에 환상이라는 양념이 가해진 기묘한 공간이다. 설탕물에서 설탕을 분리해 낼 수 없을 정도로 현실과 환상은 서로 뒤섞여 있다.


아오마메처럼 나도 최근에 다른 세상으로 번지점프를 감행했다. 과거와 결별했다고 호언장담했던 녀석처럼 나 역시 과거를 두꺼운 나무 상자 속에 넣어서 자물쇠로 잠근 후 짙푸른 심연 속으로 내려 보냈다. 그리고 과거를 꺼내 볼 열쇠는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던져 버렸다. 2019년의 일이었다. 2018년까지 달이 한 개인 세상에서 살았다면 2019년부터는 달이 두 개인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나의 2Q19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달이 한 개인 세상의 나는 타인에 의해 정의되었다.

"어, 그래, ○○○ 그 친구, 능력도 있고 인성도 훌륭하지. 참 멋진 사람이야."

이 말처럼 살았던 것이 아니라 이 말을 듣고 싶어서 살았다. 능력 있어 보이고 싶어서 남들보다 더 앞서 나가려고 했다. 더 젊은 나이에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했다.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밥 먹듯이 했으며 동시에 두세 가지 일을 해 나갔다. 바쁘게 살았다. 인성 좋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어서 직장 동료의 일을 열성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리고 술자리는 결코 빠지지 않았으며 좁쌀만 한 인간관계로 맺어진 사람에게도 조의와 축하를 표했다.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은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러고 나서 결국 상기(上記)의 평판을 얻었다. 사회생활의 금메달을 딴 것이다. 하지만 철인 마라톤에서 우승한 후 핏기 없는 몰골에 주어진 금메달은 사자(死者)의 무덤에 놓인 계절 잃은 안개꽃처럼 처량하기만 했다.


이제 그런 금메달은 사양하고 싶었다. 타인에 의해 정의되는 '나'가 아닌 나에 의해 정의되는 '나'로 살고 싶었다. 달이 두 개인 세상에서 나는 결코 능력 있어 보이기도 싫고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로 불리기도 싫었다. 남에게 멋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에게 멋지게 보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소설에서 아오마메와 덴고는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에서 한 개의 달이 뜨는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들에게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은 비정상적인 세상으로 여겨졌으리라. 하여 그들은 고속도로의 비상계단을 거슬러 올라가 원점 회귀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나에게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은 또 다른 현실이 되어버렸으므로 나는 과거로 가는 비상계단을 과감히 걷어내 버렸다. 물론 내 몸을 감싼 용수철에 의해서 어느 순간 과거로 회귀시키려는 강한 힘에 부딪힐 수도 있겠지만 그런 날이 오더라도 나는 온몸으로 저항할 것이다. 중력을 거슬러 비상하는 우주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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