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아내는 용하다는 점집에 다녀왔다. 소름 돋을 정도로 잘 들어맞는다고, 매년 한 번씩은 온다는 둥 아내 친구들의 간증이 이어진 점집이다. 평소 미신과 잡기 분야에 관심이 많던 아내는 점집에 다녀온 뒤 점쟁이가 알려준 우리 가족의 운명(?)을 빼곡히 적어왔었다. 그중 나와 관련된 내용은 현재까지 잘 들어맞진 않았다. 치질에 걸릴 수 있다는 점괘가 유일하게 핀포인트로 들어맞아서 소름이 돋긴 했지만.
질환 이외에 점쟁이는 내게 올해 승진운이 있으며, 보직이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승진은 물 건너갔으나, 보직은 점쟁이 말대로 이제 곧 바뀔 예정이다. 다음 달부터 직장인이 아닌 전업아빠가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8개월 간 그 귀하다는 남편의 육아휴직을 쓴다. 지방 사업소로 내려와 근무한 지 채 1년 남짓한 시기, 처가살이를 통해 받을 수 있는 막강한 육아 서포트, 급여감소로 예상되는 혹독한 보릿고개 등을 감안했을 때 회사에 육아휴직을 쓰겠다는 말이 입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꽤 오랜 내적 고민, 가족과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작년 11월, 구체적인 휴직기간을 정하고 회사에 휴직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동공에 격렬한 지진이 발생하던 화자인 나와 달리 청자인 팀장님과 노조위원장님은 외려 흔쾌히 수긍하셨다. 당연히 쓸 수 있는 걸 뭘 그렇게 고민하냐면서. 지나친 걱정과 염려가 한순간 말끔히 펴졌다. 충청인들의 너그러운 인심과 회사의 여건이 정말 감사하게 느껴졌다.
사측의 용단에 힘입어 노측의 이후 일정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아내의 복직, 아기의 어린이집 등원 시작 시기부터 8개월 간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낼지 대략적인 얼개를 구상해 놨다. 하지만 계획한 대로 흘러갈지는 미지수다. 아이와 함께 잘 보낼 수 있을지,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도통 감을 잡기 어렵다. 어린이집 다니기 시작하면 아기들이 자주 아픈 걸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저 아기가 지금처럼 건강히 잘 자라고 내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번 휴직 기간 동안 난 아빠로서 그리고 직업인으로서 조금은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고 싶다. 아기가 태어난 뒤 여태껏 주양육자는 아내였다. 장모님과 함께 아기를 돌보긴 했지만 엄마는 아내다. 나도 나름대로 육아에 일념 했지만 보조 역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2월부터 4월까진 아내와 함께 쉬는데, 아내는 벌써부터 자기가 복직한 뒤를 걱정하고 있다. 물가에 갓난아기랑 조금 더 큰 애를 내놓는 기분이랄까. 그게 기우에 불과하다 느끼게끔 주양육자 인계인수를 철저히 받을 것이다. 점점 먹는 양이 늘어나는 아기에게 해줄 이유식 만드는 방법부터, 육아용품의 용도와 필요시기 등도 숙지해야 한다.
아내는 이유식을 만들 때 보통 열흘 치 정도를 한꺼번에 만든다. 재료를 손질하고, 푹 삶은 뒤 갈아내서 용기에 큐브형태로 담아서 얼려둔다. 얼린 큐브들을 밥 위에 올려 해동시켜서 아기에게 먹인다. 단 두 줄짜리 문장이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다. 지금까지 딱 한번 아내가 이유식 만드는 걸 도와준 적이 있었다. 찐 재료들을 핸드믹서로 갈고 큐브에 넣는 작업에 투입됐는데, 상당히 품이 많이 들어갔다. 큐브 용량을 20g로 정확히 계량하고 용기에 네모난 모양이 잡히게끔 가지런히 넣어야 한다. 30분이 넘게 작업하다 보니 손목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아내의 노고를 가슴깊이 새길 수 있었다. 앞으로 몇 달 후엔 이 모든 작업이 오롯이 내 몫이다. 내가 설거지할 때마다 매의 눈으로 식기류 청결상태를 확인하던 아내인 만큼, 이유식 만들기 인계인수 때도 확실한 지도편달이 예상된다.
아빠로서의 레벨업 기간 동안 커리어를 위한 준비도 확실히 해놓을 예정이다. 아기가 어린이집에 가는 시간과 잠든 시간 등을 활용해 자격증과 업무 관련 공부계획을 짜놨다. 이건 이유식 만들기나 아기와 놀아주기와는 달리 100%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예전처럼 미적대고 스마트폰을 쳐다보지 않고 몰입해서 공부할 것이다. 정확한 아날로그 구글 타이머와 달리 아기는 낮잠을 자다 언제든 깰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하는 것과 상관없이. 순도 높은 공부와 육아를 위해서는 체력도 뒷받침 돼야 한다. 장거리 출퇴근과 육아를 핑계로 소홀히 했던 운동도 다시 하기로 마음먹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이렇게 오랜 기간 학생이나 직장인으로서 긴 공백을 가지는 게 처음이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몰려온다. 그럼에도 이것 하나만큼은 지키고 싶다. 하루하루를 깊고 충만하게 살자. 아기와 함께 있을 땐 아기의 바다처럼 깊은 눈망울, 무해한 파안(波顔), 옹알이를 최대한 많이 담아두고, 나 스스로 계획한 목표는 차근차근 해내가자. 살면서 어쩌면 다시 오기 힘들 귀한 시간이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 육아휴직을 했던 기간이 반짝이게끔 만들고 싶다. 점쟁이가 예측한 나의 보직변경이 인생에서 가장 잘 내린 결정 중 하나가 됐으면 좋겠다.
시간은 나의 재산. 나의 경작지는 시간.
오늘과 내일 사이에는 아직 긴 시간이 있다.
괴테, <서동 시집>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