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회사 후배의 슬픔

번아웃이 온 부서 후배

by 이진

지박령처럼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추위가 한풀 꺾인 3월 첫째 주의 단조로운 오후. 차장님께서 대뜸 파트원들에게 티타임을 제안하셨다. 우리는 안락한 의자가 도열돼있는 회의실에 모여 앉아 차장님이 운을 떼길 잠시 기다렸다. 이야기는 우리 부서에 나보다 1년 먼저 들어온 후배 B에 관한 것이었다.


-어제저녁에 B가 나한테 찾아와 말했어. 많이 힘들다고.


후배 B는 내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는, 결혼 2년 차 30대 초반의 친구다. 꼼꼼하고 책임감 있게 업무를 본다. 후배지만 부서 전입은 나보다 빨라, 종종 B에게 업무 관련 질문도 나눴었다. 파티션에 가려져 있어 나는 항상 의자에서 일어나 B를 불러서 물어봐야 했고, 그때마다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던 B의 눈빛은 비장해 보이기도 했다.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번아웃인 것 같아. 회사에서는 버틸만하고 괜찮았대. 그런데 회사를 퇴근하고 나서 문제였던 거야. 자꾸 일이 생각나고 집착이 생겨서 스트레스가 쌓였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네.


차장님으로부터 번아웃이란 단어를 듣고서야 아차 싶었다. 파티션 너머 알아보았던 B의 눈빛을 나는 잘못 읽었던 것이었다. B는 팽팽하게 잡아당겨져 버티고 있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집중하고 있구나 정도로 생각한 게 낯부끄러워졌다.


-B 스타일 알잖아. 꼼꼼하게 챙기고 열의를 갖고 업무를 처리하는데도, 일은 계속 쌓여만 갔던 거야. 자기가 쏟는 노력에 비해 성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 보니 자존감도 떨어진 거지.


우리 부서는 택지, 산단 등에 전력공급을 위한 설계, 공사관리 업무 등을 수행한다. 부서 특성상 담당하는 지역들이 대규모인 경우 캐캐 묵은 난제들이 쌓이게 된다. 택지지구가 지정되고 기반시설이 들어서는 긴 시간 동안 전기공사는 시공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들이 발생한다. B가 담당하던 택지는 2010년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그때부터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았지만 쉽사리 해결되진 않았다.


-증세가 심해져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받았고 최근 들어 약을 먹기 시작했대. B는 일단 휴직을 하고 싶어 하는데, 조금 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어. 약 먹으면서 추이를 좀 지켜보고. 그동안 우리는 B가 부담을 덜 수 있게끔 해야 할 듯싶네. B가 맡고 있는 공사들을 파트원들이 서포트해주자고. 만약 B가 휴직을 하게 된다면 그때 업무배분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보자.


약을 먹을 정도로 힘들었구나. 회사에 다니며 회사는 회사일뿐이라며 거리두기를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업무로 만난 사이니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눠야 한다는 일련의 초(超) 인류적 가치관을 가진 내가 일순간 한심해졌다. 같은 공간에서 1년 넘게 지내왔던 사이인데 이렇게 힘들 때까지 나를 포함해 파트원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B가 얘기하면서 감정이 격해졌는지 울먹이더라고. 파트원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얘길 꺼내기까지 많이 고민하고 망설였던 것 같아. B가 잘 추스를 수 있게 우리가 옆에서 도와주자고.


B가 없는 자리에서 B의 이야기를 나눈 뒤 사무실로 돌아왔다. B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B의 빈자리에는 옅은 슬픔과 허무함이 껴있었다. 짐짓 모른 체했던, 아니 알아채고자 노력하지 않았던 B의 슬픔을 너무 늦게 알게 됐다. 착잡했다.



B를 옭아맸던 일들에서 나 또한 자유로운 편은 아니다. 나 역시 골치 아픈 문제를 가진 공사들이 있고, 해결하기 쉽지 않다. 이 부서로 옮겨온 작년에는 그런 문제들로 골머리를 썩곤 했다. 이제는 달라졌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떻게든 된다라는 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체득했다. 100점짜리 정답은 아니더라도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된다는 믿음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일의 속박에서 풀려났고 퇴근하면서 내 머릿속 스위치를 꺼버린다. 그 이후엔 회사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사무실에 출근해 부장님 차장님께 인사드리고 내 자리에 앉는 순간 스위치를 다시 켤 때까지 내가 '회사원'임을 망각하려 한다.


이건 그저 내 이야기일 뿐이다. B에게 맘 편히 먹으라며 짜샤 나처럼 해봐라고 권할 수는 없다. 같은 파트원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B가 일의 속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길 옆에서 조용히 기다려주는 것뿐이다. B는 잘하고 있고, 누구보다 우리 부서에서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음 주 월요일 B가 일주일 여만에 출근할 예정이다. 파티션 너머로 B의 자리로 다가가 질문 대신 안부를 건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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