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얼마 전 tvN 예능 <유퀴즈 온더 블럭>을 보는데 이 카피가 등장했다. 어떤 광고에 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카피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이 카피를 쓴 출연자는 제일기획 임원 출신의 우리나라 최초 여성 카피라이터인 최인아 대표다. 그녀는 재직 시절 여성이 수동적이고 약자로 비치던 이미지를 반전시키고 싶었다. 여성 직장인이 많지 않던 시절, 자신이 직장에서 분투하는 경험을 연료 삼아 이 카피를 썼다고 한다.
프로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프로야구, 아이폰 프로, 조프로(스크린골프 칠 때 설정하는 내 닉네임) 등등... 대체로 전문적이고 수준 있는, 멋있는 이미지다. 특히 직장에서 '프로'라 불리는 사람들은 더 그렇다. 맡은 업무에 온전히 집중하고,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고, 사적인 감정을 일에 섞지 않는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직장인의 모습이 '프로' 이 두 음절의 단어에 담겨있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과연 나는 회사에서 프로일까? 이건 너무 직설적이다. 조금 덜 민망하게 질문을 바꿔보자. 과연 나는 회사에서 프로처럼 보일까?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응, 아니야" 덧붙여 이런 말을 더 자주 들을 것이다. 아마추어 같이 왜 그래? 6년 차 직장인이지만 나는 너무나 아마추어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종종 일에 감정을 싣기 때문이다.
나는 업무 특성상 민원인부터 공무원, 공사업체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맞닥뜨린다. 대부분의 업무가 상대와의 의견 조율을 거쳐야만 진행이 가능하다. 조율이라는 단어는 참 아름답지만, 그 단어까지 이르는 과정에는 무수한 불협화음이 존재한다. 불협화음의 날카로움에 신경이 곤두서 종종 감정을 일에 얹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난주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측 공사가 진행되는 현장에 다른 건설사 쪽과 협의할 사안이었다. 시공 사항이 상대측 건설사의 일정이 앞당겨져 변경되는 상황이었다. 시공 변경의 근거자료를 위해 나는 상대 쪽 실무자에게 공문으로 현재 사안을 보내달라 요청했다. 공문을 보내기 전 메일로 세부내용을 협의하자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상대측 실무자는 공문을 먼저 보냈다. 성의 없이 문자메시지로 공문 내용 캡처본을 같이 보낸 뒤였다. 공문의 세부내용은 현재까지 추진경위를 자신들의 입장에서 써냈다. 세부내용은 틀린 부분이 있었고, 워딩은 전적으로 우리를 탓하는 식이었다. 협의가 아닌 통보였다. 두장짜리 공문에는 나에 대한 배려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화가 났다. 곧장 상대측 실무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 실무자의 무례함을 지적하며 나는 큰소리로 통화했다. 어이가 없다. 이런 식으로 업무처리를 하시느냐.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감정이 주체되지 않았다. 내 지적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대답은 죄송하다 어쩔 수 없었다였다. 자신들도 상부에 보고 드린 뒤 이 내용으로 보내는 걸 결재받고 우리 쪽의 회신을 빨리 받아야 했기 때문이란다.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에 순간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는 되고 나는 안되나?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그러다 문득 인지했다. 화에 휩싸여 업무상 통화에 큰소리를 내뱉고 있는 내 자신을. 이렇게 큰소리를 내는 게 불필요한 감정 소모일뿐더러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도 아님을.
수화기를 손에 쥔 채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치솟던 감정의 그래프를 꺾고서 차분하게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성을 수화기에 주입했다. 공문은 이미 접수된 상황이니 앞으로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지 협의하자고 한 뒤 통화를 마쳤다.
목소리를 높인 탓에 같은 부서 과장님이 내 자리로 오셔서 어깨를 토닥이고 가셨다. 부끄러워졌다. 불과 한두 달 전에도 비슷한 일로 감정을 왈칵 쏟아낸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감정조절이 너무 안돼서 상대편에게 비꼬는 말투를 쓰기까지 했다. 다신 그러지 말자 해놓고서 또다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때는 큰 불이 났다면 이번에는 큰 불로 번지기 전 물 한바가지를 뿌려 진화에 성공했다.
두 번의 사건을 통해 내 자신을 알게 됐다. 부당하거나 무례한 경우를 당하면 나는 쉽게 감정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이를 업무까지 끌여들인다는 것. 앞으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평소 명상을 하며 배웠던 지혜가 필요하다. 감정을 인식하기. 화가 올라왔을 때 호흡을 고른 뒤, 감정을 한발치 떨어져 바라본다. 내가 무엇에,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생각한다. 그러면 서서히 평안함과 이성을 되찾을 수 있다.
일에 감정을 얹지 않는 건 쉽지 않다. 매뉴얼처럼 위 방법을 외우고 있어도 정작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업무에 사사로운 감정을 넣다 보면 결국 나 스스로만 해치는 독일 뿐이다. 복세편살이라 했던가.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려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편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도 일에 감정을 얹는 경우를 줄여야 한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프로라는 단어에 가까워질 것이다.
나는 프로이고 싶다. 프로는 아름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