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 Apr 10. 2022

가기 싫던 제사에서 야유회를 벌였습니다.

하루하루 봄기운이 차오르는 이맘때면 우리 친가는 제사를 지낸다. 나는 설날, 추석에 차례를 지낼 때만 참석했었다. 제사라 하면 내게는 그저 협소한 큰집에 모여, 친척 어른들께서 '알아서' 제사를 지내신다 생각됐을 뿐이었다. 부모님께서도 내게 특별히 제사 때 내려오라 하신 적도 없었기에 자연스레 참여하지 않게 됐다. 조그마한 큰집에서 한껏 취기가 오르신 어른들을 상대하기 어려웠던 것도 제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게 된 이유다.


우리 집안 어른들은 모이기만 하면 다량의 알코올을 섭취하신다. 다들 연배가  있으신도 웬만한 젊은이들을 뛰어넘는 주량을 겸비하셨다. 명절 때는 낮부터 술상이 차려져 저녁까지 이어진다. 다음날 일어나 보면 큰집 베란다에는 청록색 병들이 제식을 맞춰 도열해있다. 혀를 내두를 정도다. 같은 핏줄을 가진 어른들이지만 종종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얼마 전, 뱅크샐러드라는 어플에서 무료로 유전자 검사를 받았다. 탈모, 비만, 혈당 등 내 유전자의 형질을 분석해준다. 치열한 경쟁 끝에 검사신청에 성공했고 얼마 전 분석 결과를 받았다. 내 유전자에는 경이로운 우리 가문의 DNA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수능으로 치면 2등급

본 투비 술고래. 친가 어른들의 대단한 주량은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큰아버지의 말씀에 의거하면, 우리 가문의 '간'이 평균보다 크다고 하셨다. 그랬다. 나는 간 큰 놈이었던 것이다. 사회생활하는 동안 간 큰 게 어찌 됐든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다. 이렇다 할 주사를 부려본 적도 없었고, 조절하면서 술을 마시는 게 습관이 돼서 술 때문에 실수해본 적은 없다.



대대손손 전해져 온 유전자를 남겨주신 증조, 조부모님의 제사에 올해 처음 참여하게 됐다. 자발적 참여라기보다는 아다리가 맞았다. 이번 주말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계획했는데 공교롭게 제삿날과 겹친 것이다. 나도 처음 제사를 가는데 거기에 아내까지 동행하게 됐다. 그래도 부담은 덜했다. 큰아버지 거동이 불편해지시면서, 작년부터 제사를 선산에서만 지내기 때문이다.


정오에 다다를 무렵 친가 식구들이 하나둘 선산에 모이기 시작했다. 고모들과 큰어머님은 제사음식부터 여러 가지를 준비해 오셨다. 섬에서 어업을 하시는, 입이 걸지만 정 많은 막내 고모와 고모부께서 우리 식구들을 위해 소라를 캐오셨다.

 

바다가 담긴 생소라


"이거 갖다 팔면 30만 원어치여. 감사하게 먹어라잉"

돗자리 위에 앉은 식구들 일동은 고모, 고모부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새벽부터 산지 직송해오신 소라회에 초장을 듬뿍 발라 먹었다. 과육을 삼키는 것처럼 달고 신선했다. 맛있게 먹는 식구들을 보며 고모부는 인기쟁이가 된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막내 고모가 갖고 오신 신선한 소라를 필두로, 큰고모께서 해오신 찰밥, 꽃게무침, 홍어회무침에 큰어머님께서 만든 양념족발, 야산에서 직접 캐신 돌미나리로 만든 나물 등 산해진미를 노란 돗자리 위에서 즐겼다. 술잔과 안주 사이로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오갔다. 먹을거리를 소분해주시던 큰고모는 "우리 엄마가 뒤에서 흐뭇하게 보고 계시겄어."라며 밝은 미소를 보이셨다. 큰아버지들과 아버지는 간 큰 가문답게 금세 소주 4-5병을 드셨다. 막내 고모는 술잔을 비워놓고 기다리시는데 아무도 안 준다며 투덜거리셨다.

선산에서 산해진미 브런치를 즐긴 조 씨 가문


우리 부부는 선산에서 바로 집으로 올라가야 해서 너무나 아쉽게도(?), 좋은 안주들을 두고서 술 한잔 기울이지 못했다. 한창 야유회가 무르익을 무렵 우리는 큰고모와 큰어머님께서 해주신 먹을거리들을 아이스박스에 한가득 싣고서, 먼저 인사를 드린 뒤 올라왔다. 트렁크와 뒷좌석이 우리 가문의 정성과 사랑으로 가득 찼다.


내년이면 우리 아버지는 환갑을 맞이하고, 큰고모는 칠순을 맞이하신다. 간 크신 어른들께서는 내년에 단체버스를 대절해 놀러 가자는 계획을 세우셨다. 막내 고모는 한술 더 떠 한 일주일 전국투어를 가자고 하셨다. 조상님들의 선산에서 우리 식구들은 화기애애 야유회를 벌였고 우애를 다지셨다. 그런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났다. 가끔은 취해서 형제지간끼리 투닥대고 욕지거리도 하는 어른들. 다신 안보겠다며 의절하자고 고래고래 소리도 치는 어른들. 그런 모습을 보며 다 큰 어른들이 왜그럴까 싶은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이 집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게 여러모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산에서 제사를 빌미로 야유회를 벌이는 어른들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어머님은 닭볶음탕이 쉽다고 하셨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