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한 가지 습관이 생겼습니다. 자기 전에 짤막하게 시집을 읽고 있습니다. 20분 남짓, 시 5-6편을 읽으면 잠도 잘 오고 하루를 정갈하게 매듭짓는 기분이 듭니다. 다만 문해력이 한참 모자라다 보니 시구를 파악하고 음미하는 데는 대부분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가끔씩 마음에 와닿아 피어나는 시가 있으면 사진을 찍어놓고 필사하며 글맛을 느껴보고 있습니다.
시의 매력은 일상적인 단어와 문장이라는 씨실과 날실로 촘촘하게 세상을 엮어내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말합니다.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다라고. 낭만이 오글거림으로 대체되는 세상에서 공허한 구호에 불과할지도,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는 자주 잊고 있을지도 모를 사실입니다. 하지만 책장에 꽂혀있는 시집을 꺼내 읽다 보면 금세 깨닫습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임을.
어젯밤 일입니다. 동네에서 맥주축제가 한창이라 아내와 함께 나가보았습니다. 완벽한 날씨였던 주말인지라 그런지 행사장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들어찼습니다. 너른 잔디광장에 도열한 테이블 한 곳에 자릴 잡고 시원한 맥주로 다가오는 가을을 축였습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가운데 장내 MC가 관중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2 행시 이벤트였습니다. 축제에 섭외된 래퍼 '한해'의 이름으로 2행시 짓기였습니다. MC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건넸고, 다양한 2행시가 쏟아졌습니다. 1등은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께서 차지하셨습니다. MC가 아저씨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며 '한!'이라고 크게 운을 띄웠고, 아저씨의 시구에 장내는 떠나갈 듯했습니다. 이미 1등이 확정된 순간이었습니다. 아저씨가 지은 '한해' 이행시는 이랬습니다.
한:한잔 했더니! 해:해가 기울었네.
아저씨가 시작(詩作)을 마치자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아저씨는 시를 짓고서 태연히 맥주를 들이키셨습니다. 단 두 마디로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은 그 아저씨가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순발력, 재치, 센스 모든 게 어우러진, 맥주 축제에서 지을 수 있는 최고의 시였습니다. 별다를 것 없는 두 문장으로 만든 2행시가 시원하게 들이켰던 맥주보다 끝 맛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요 근래 접한 시 중 가장 깊은 맛이었습니다.
일상의 언어로 삶을 그려낸 아저씨의 2행시 덕분에 축제에 온 사람들은 맥주를 더 벌컥였을테고, 또렷해진 가을밤 공기를 한껏 느끼고, 잃어버렸던 낭만을 곱씹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아저씨의 2행시 덕분에 시를 짓는다는 게 거창하고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 편견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한 땀 한 땀 새기고 사랑하며 살면 언젠가는 저도 아저씨처럼 멋진 시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늦여름 밤이었습니다.
아저씨의 2행시를 듣고 생각난 박준의 시를 덧붙이며 쓸데없이 길었던 2행시 감상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