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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Jan 02. 2022

망설이면 벌어지는 일...

고양이와 요강



     ‘지금이라도 싫다고 말할까?’


 네 살배기 선이는 뒷좌석 창문에 매달려 멀어져 가는 집을 바라보았다. 점점 작아지는 집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서! 더 늦기 전에 차를 세우라고 말해야 해!’


     머릿속이 하얘지며 끊임없는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중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나와주질 않았다. 집은 이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눈물을 삼킨 선이는 포기하고 자리에 돌아앉았다.
     

      ‘엄마…엄마…엄마…’


     엄마라는 이름만 속으로 불러보았다.


     “선아, 고모 집에 놀러 갈까?”


     “거기가면 우리 선이랑 놀아 줄 언니 오빠들도 많고 고양이도 있다.”


     “고모가 까까 사 줄게, 고모 따라가자.”


     “응 좋아, 선이 고모 집에 따라 갈래!!!”


 돌부터 말을 잘 하는 선이는 고모의 꾐에 망설임 없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말을 내뱉은 순간 본능적으로 무언가 단단히 잘못했다는 걸 알았다.


     “올케, 선이 내가 데리고 올라갈게. 짐 챙겨 줘. 한 석 달 데리고 있을 테니까 옷 넉넉하게 넣어.”


 선이의 엄마는 어린 딸을 시누이 손에 맡기는 게 내키지 않아 짐을 챙기는 손길이 침울했다. 그녀는 시어머니에 시아주버니 식구들까지 대 가족 살림을 도맡고 있었다. 남편 사업을 돕느라 직원들 식사를 챙기자면 조석으로 20여명 분의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유치원과 학교에 가는 두 오빠들과 달리 아직 어린 선이는 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시어머니는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어도 한 번을 안아주는 일이 없었다. 바쁜 일과에 혼자 노는 막내딸과 눈 한번 맞출 시간조차 없으니 그녀는 시누이의 제안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고모는 종로의 한 대학교 앞에서 하숙을 쳤다.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많았지만 선이와 놀아줄 만큼 한가하진 않았다. 그나마 집에 잘 들어오는 수경 언니와 덕배 오빠는 가끔 선 이에게 색종이를 접어주거나 글자를 가르쳐 주곤 했다. 고모의 말처럼 하숙집엔 고양이도 있었다. 그러나 귀여운 아기 고양이를 기대한 선이의 바람과 달리 거대한 몸집에 심술 맞아 보이는 검은 고양이가 그녀를 반겼다.  녀석은 아이가 잠들기만 하면 배 위에 올라앉아 휴식을 취했다. 낮잠을 자다 답답함에 눈을 뜨면 배 위에서 내려다보는 날카로운 눈과 마주치기 일쑤였다. 작은 몸을 누르는 그 무게와 무시하는 듯 바라보는 호박색 눈동자를 선이는 어른이 돼서도 잊지 못했다. 어쩌면 스무 살이 넘도록 그녀를 괴롭히던 잦은 가위눌림도 그 고양이로부터 기인했는지 모른다.


 하숙집 화장실은 긴 복도 끝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다. 선이는 빛이 잘 들지 않아 낮에도 컴컴한 반수세식 화장실이 무서웠다. 바쁜 고모에게 자꾸 화장실을 가자고 하기 눈치가 보여 화장실을 참는 버릇이 생겼다. 하루는 참을 때까지 참았는데 화장실을 함께 가줄 고모가 보이질 않았다. 아이는 안방에 놓여있는 요강이 떠올랐다. 그 요강은 고모 일을 도와주는 이모할머니 전용 요강이었다. 이모할머니는 선이가 온 첫날부터 그 요강 쓸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단단히 엄포를 놓은 터였다. 선이는 갈등했다. 무서운 화장실에 홀로 용감하게 들어갈 것인가. 요강을 택하고 이모할머니에게 혼구멍이 날 것인가… 요강의 승리였다. 선이는 요강에 큰 볼일을 보았다.


     “선이 이놈의 자식 어딨어!!! 할미가 요강에 손대지 말랬지!!

      어디서 요강에 똥을 눠 똥을 누길! 너 이리 안 와!!

      오늘 아주 버르장머리를 고쳐야지 안 되겠어!!"


 우레 같은 고함 소리에 놀란 선이는 울면서 도망을 다녔고 이모할머니는 싸리 빗자루를 휘두르며 아이 뒤를 쫓아다녔다. 고모는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멀리서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결국 엉덩이와 종아리를 흠씬 두들겨 맞고서야 이모할머니의 손에서 풀려났다. 선이는 북받치는 서러움에 엄마를 부르며 한참을 울다 잠이 들었다.


 네 살배기 선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트리플 A형 급 소심쟁이임을 자각하고 있다. 어물쩍 망설이다간 고모네 집 사건처럼 낭패를 겪게 된다는 것도. 하지만 여전히 거절을 해야 할 때나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해야 할 때 마음속의 외침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어 불편함을 느낀다. 그런 스스로가 답답한 날이면 고모네 하숙집 고양이와 요강이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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