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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Jan 01. 2022

천장과 바닥 사이

살고 싶다는 농담







 까칠한 이미지, 거침없는 입담.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작가이자 방송인 허지웅의 이미지였다.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쏟아내고,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비난과 악플에도 기죽지 않는다. 어쩌면 나에게 없는 그 자신감이 부러워 그런 성향을 불편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그가 아프다는 소식과 함께 방송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존재가 잊혀 갈 즈음 다시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눈여겨보지 않아도 그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전과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행동은 조금 더 신중해졌고 눈빛은 깊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했다. 그가 에세이집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는 혈액 암의 일종인 악성 림프종을 앓았다. 혈액을 타고 암세포가 전신에 퍼져 수술도 할 수 없는 암이라고 한다. 계속되는 항암치료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온다. 퀭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누워 천장이 천천히 내려와 내 몸을 눌러오는 것을 느끼고 꼼짝없이 잠을 설치며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잔인한지 알게 되는 날. 바닥에 뒹굴어 뺨이 닿았을 때 광대 깊숙이 울림을 느끼며 그게 얼마나 딱딱하고 차가웠던 것인지 깨닫게 되는 날이 말이다.” P. 37

“3차 항암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망가져 있다는 말을 내가 얼마나 쉽고 편하게 써왔는지 그때 알았다.” “단 하루만 통증 없이 잘 수 있다면 평생 머리털과 눈썹이 없어도 상관없다.” P.39


고통의 시간들을 담담한 필체로 써 내려갔다.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한 그는 스스로 참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며, 도움을 청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통증과 두려움, 외로움 속에서 홀로 갈등하고 사투를 버리며 느꼈을 처절한 고독의 시간이 가슴에 닿아 나도 모르게 두 뺨이 젖어들었다.


자신이 도대체 살고 싶은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고통이 극에 다다르자 그는 어느 밤 아주 당연한 듯 죽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남아있는 마약성 진통제와 수면제를 한입에 털어 넣는다. 그 밤, 그는 죽지 않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불분명한 혼돈의 상태에서 그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선명한 폭죽 소리였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동안 그를 괴롭혀 온 삶의 모든 고뇌에 대해 “구체적인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그 밤 이후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투병생활은 여전히 힘들었으나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절망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그는 여전히 살아있고 전보다 건강하며 전보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있다. 그 비결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그날 밤에 겪은 일 때문이 아니다.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P.45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느꼈다. 천장이 무너지고 바닥이 솟구치는 경험을 한 뒤에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울림은 그가 그 고통을 감당한 것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에서 온다. 그는 삶의 붕괴 현장에서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해 내고 있을 수많은 이들에게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죽지 못해 관성과 비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이다.”

“그 밤은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P46



항암치료에서 벗어난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고민 상담을 해왔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답을 해주기도 하고 전화 상담도 해주었다. 그러다 하루에 들어오는 상담이 500건이 넘어가면서 일일이 답을 해주기가 어려워질 정도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그중 인상 깊었던 상담자에 대해 소개하기도 하고 미처 답하지 못한 고민들에 대해 답을 들려주기도 한다. 영화 평론가답게 여러 작품들을 소개하며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삶의 철학들로 그의 답을 대신하기도 한다.

작품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그가 가진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결핍보다는 희망, 용기, 감사와 같은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내가 생각했듯, 차갑고 뾰족하고 사람이 아니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 것 같다.



<스타워즈>에서 제다이가 말하는 포스란 “균형”이라고 한다. 작가는 그것이 “마음에 평정심을 회복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나는 앞으로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포스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라며.”p274



  이 책은 단순한 투병기가 아니다. 고통의 나락에서 건져 올린 깨달음과 여전히 그곳에서 힘들어하는 영혼들을 위한 그의 진심 어린 조언이 담긴 따뜻한 편지와 같은 책이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 그가 보낸 편지를 열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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