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 카드 이야기
나의 가방은 언제나 무거웠다. 학창 시절 즐겨 매던 빨간색 잔스포츠 가방은 산에 오르는 사람처럼 가득 차 있었고 대학시절도 작고 예쁜 핸드백보다는 짐이 많이 들어가는 배낭형 가방을 고수했다. 야간 자율학습 세대이자 초기 급식 세대인 나는 자정이 다되어 집에 들어가 아침 6시 반이면 집을 나서야 했고 도시락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혹시 모를 밤샘 학구열을 대비해서 과목별 책을 짊어지고 다녔다. 물론 한 번도 그런 학구열을 불태운 적은 없다. 대학 때는 무거운 전공책들에 공강 시간에 읽을 소설책이며 화장품, 우산, 각종 휴대용품 등등 불쌍한 나의 어깨를 혹사시키곤 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은 준비성이 철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의 짐들이 그다지 쓸 일이 없다는 것은 학습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무거운 나의 가방은 불안한 나의 마음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돕는 누름돌이었을 것이다.
타로 카드 속 제일 첫 번째 카드 0번 The fool 카드는 일명 '바보의 여행' 카드라고 불린다. 그림 속 주인공인 '바보'는 한 손엔 속옷이나 한 두 장 들었을법한 작은 봇짐이 걸린 나무 막대를 들고 다른 한 손엔 흰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춤을 추듯 걸어간다. 그것도 바로 앞이 낭떠러지인 절벽 끝을 향해서 말이다. 어째서 주인공을 바보라고 부르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발 밑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꽃의 향기로움과 여행의 설렘, 순간의 즐거움에만 빠져 있는 것이다. 78장의 타로 카드는 바보의 인생 여정 스토리를 담고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카드가 1번이 아닌 0번인 점, 인생 여정의 주인공이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부분은 정말이지 우리의 탄생 시점 그리고 삶 속에서 만나는 미지의 순간들과 닮아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나 삶의 여행을 시작하고 수많은 도전과 모험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 무모한 여행자의 카드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자면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우선 그 순수함과 경쾌함, 가볍게 떠나갈 수 있는 자유로움이 부럽다. 이제 나의 어깨에 걸린 보이지 않는 꾸러미는 20여 년 전 잔스포츠 배낭의 무게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다. 섣불리 맨몸으로 여행길에 오르는 것을 나의 이성은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몇 년 전 남편이 삶의 큰 시련과 마주했을 때 초등학생이던 아이를 데리고 세계 일주를 떠나자 했다. 학교도 일도 집도 모두 정리하고 맨몸으로 낯선 곳에 간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공포스러웠다. 나의 결사반대로 우리 가족을 여행 블로거로 만들었을지 모를 세계일주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때 풀카드의 바보처럼 훌쩍 떠났다면 지금 삶은 어땠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구릿빛 피부의 보헤미안 가족은 캠핑카를 둥지 삼아 아직도 여기저기 떠돌고 있을까. 이국의 석양을 바라보며 텐트에 배를 깔고 누워 일기를 끄적이고 있지는 않을까. 여전히 묵직한 누름돌을 장착하고 사는 나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생각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면 그저 아련한 아쉬움과 동경의 마음이 들뿐이다.
새롭고 낯선 세상에 발을 디디는 것은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용기가 작동하기도 전에 선택과 결정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상하게도 앞 뒤 가릴 것 없이 거침없이 뛰어들던 순간들. 내 나라를 떠나 호주행을 결심하던 날, 사랑에 빠지던 몇 번의 순간들, 청혼을 받아들이던 때가 내겐 그랬다. 나는 머리가 고장 난 것처럼 이성적 계산을 하지 못했다. 벼랑 끝에서 눈을 감고 장미향을 맡는 '바보'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나 자신의 의지대로 태어나고 이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시스템에 의해 이 세상, 바로 그 가정에 태어나 숙명적 환경 아래 자라나게 된다. 그런 것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어떤 결정을 내리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순간들 또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의한 것일 수 있다. 바보의 여정은 우리가 태어나 살아가는 삶 전체이기도 하고 그 안의 작은 순간순간들이기도 하다. 절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불확실성의 인생. 그런 여행길에서도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현명한' 바보가 아닐까 한다.
다행인 것은 풀 카드 속 하늘엔 세상을 밝히는 태양이 떠 있고 바보의 곁에는 위험을 알려주듯 짖어대는 하얀 강아지가 있다. 설레고 들뜬 와중에도 눈과 귀를 열고 깨어 있을 것. 그리하면 낭떠러지 너머로 발을 디디는 실수는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질없는 짐 따위는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모험을 떠나는 바보의 여정 속에는 곳곳에 아름답고 근사한 장면들이 숨어있다. 오늘 뽑아 든 카드가 0번 풀카드라면? 어떤 질문을 던졌다 해도 어차피 떠나야 할 길이라면 모든 모험의 순간들을 기꺼이 즐기고 받아들이는 현명한 바보로 살아볼 일이다. 열린 마음과 깨어있음이란 봇짐만은 들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