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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줄박이물돼지 Nov 20. 2021

2021.10.19 밤의 명덕외고

명덕외고는 돈 많은 학교였지만, 학생들을 위해 나무 마루도 깔아주지 않을 정도로 인색했다. 바닥은 거무튀튀한 화강암 무늬의 돌바닥에 밝은 누런색의 구리 줄이 박혀서 구획을 나누고 있었다. 딱딱하고 미끄러웠다. WWE를 한창 보던 아이들은 곧잘 교실 뒤에서 레슬링을 하고 놀았지만, 피니쉬 기술은 한결같이 크리스 제리코의 walls of jericho였다. 초크 슬램이나 파이브 스타 프로그 스플래시 같은 기술을 했다간 머리 깨 먹기 딱 좋은 바닥이었다. 이런 바닥도 청소할 때는 나름 장점이 있었는데, 나무 마루와는 다르게 먼지가 나무 사이사이로 들어가는 일이 없었다. 물걸레질을 피할 핑계가 없다는 단점도 있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물걸레질을 했음에도 교실 안은 먼지로 가득했다. 45명이 넘는 애들이 스웨터며 더플코트를 입고 날뛰어 대는 통에 먼지 끊일 일이 없었다. 한 녀석이 먼지가 많다며 창문을 열었다. 창문은 얇은 알미늄 섀시의 단창이었고 교실 난방이라곤 뜨거운 물이 미지근하게 도는 라디에이터 두 대 뿐이었다. 나머지 난방은 학생들의 체온으로 이루어졌기에, 겨울의 교실은 창문을 열지 않아도 매우 추웠다. 창문을 연 남학생에 대한 친구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도 기죽지 않고 받아쳤다. 먼지가 너무 많아. 여기가 탄광촌도 아니고 교실에서 공부만 했는 데 천식 걸리는 게 말이 되냐? 친구들은 그가 수능 준비 중에 객혈을 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구시렁대면서도 각자 담요와 옷을 여몄다. 수능도 끝났고, 오전에만 조금 삐대다 집에 가면 되었으므로 마냥 행복했다. 그렇게 열어놓은 창문을 조금 지키던 남학생은 창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왔다. 옆자리에는 옆 반 여학생이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이었다. 1학년 때는 제법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수능이 다가올수록 교류가 뜸해진 사이였다. 항상 동글동글한 안경을 썼고 머리카락 하나 삐져나오지 않게 잘 빗은 채 묶고 다녀서 밤톨 같은 느낌을 주는 친구였다.

안녕? 오랜만이지? 여학생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했다. 남자애는 함빡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어쩐 일이야? 어, 그냥 수능도 끝났고 해서.. 남자애는 친구가 대학에 수시로 붙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수시 합격자들은 면학분위기 조성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수능 전에 야자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주 못 봤군. 남자애가 그간 격조했던 이유를 속으로 납득하는 동안 여자애가 숨을 골랐다. 우리 11월 11일에 밥같이 먹을래? 또박또박했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밥같이 먹자는 단순한 얘기에 왜? 우린 이런 얘기를 설레면서 할 사이가 아니잖아? 남자애는 눈치가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래. 좋아. 맛있는 거 먹자! 11월 11일은 음력으로 1월 1일이야. 너 생일 음력으로 세? 여자애는 생일에 그를 만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도 이제 여자애의 제안이 그저 밥 먹자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상대의 설렘이 전해지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우리 예전에 저녁 즈음마다 보던, 주황색으로 물들던 논을 이제 같이 볼 일이 없겠지? 왜냐면 이제 논이 없어. 다 개발 됐거든. 서울에 농경지가 웬 말이람. 마곡역에 전철이 정차하지 않던 시절도 다 옛말이야. 우리가 몰래 소주 마시던 논 한가운데 닭갈비 팔던 비닐하우스도 다 사라졌대. 너무 늦기 전에 버크셔나 왕창 사두는 게 어떨까? 침착해졌다곤 해도 남자애 머릿속엔 여느 때처럼 개소리만 생각났다. 반면 여자애는 데이트가 성사되었다는 기쁨으로 꽤 들떠 있었다. 우리 그날 만나면 포토월에서 사진도 같이 찍자. 포토월? 우리 가는 곳에 그런 게 있어? 조금 생각해 보니 그는 포토월에 설 자격이 있었다. 10대에 벌써 많은 것을 이루었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버크셔도 꽤나 모았고. 우쭐해진 그가 말했다. 사진 예쁘게 찍히려면 살 빼고 가야겠다. 네가 뺄 살이 어딨어? 없긴 왜 없어. 요새는 힘주고 서 있어도 배가 나와.  그래? 그렇게 안 보이는데? 지금 몇 킬로야? 71킬로 정도 될 껄? 기분이 묘했다. 말이 왜 헛나왔지? 그는 요새 86킬로가 넘어서 고민이었다. 혈당도 높아서 조절해야 하는데 71킬로 정도면 삼시세끼 피자 한 판씩 먹어도 될 정도로 날씬한 수준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회사에 가야 해서 밤에 둘째 밥 안 먹여도 되어 다행이었다. 둘째가 있으니까 벌써 결혼을 했네. 나이도 10대가 아니라 30대였다. 10대였다면 여자애가 말을 걸었을 때 심장 쫄려서 대답도 제대로 못했을 것이다. 그제서야 심장이 쫄려왔다. 내가 10대에 이뤘다고 착각했던 것들이 실은 30대 후반에서야 이룬 것이었다. 앞으로 이루어야 할 일들이 많은데 벌써 20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새벽 5시쯤 깼다. 무슨 꿈이었는지 써놓으려고 컴퓨터를 켰는데 롤드컵 중계 live가 떠 있어서 아연했다. 그룹 스테이지 진출한 4팀 모두 동률이 나왔다고 한다. 자기 전에 젠지가 LNG한테 지면 개꿀잼 되겠네 싶었는데 TL한테도 진 모양이다. 지켜보는 어떤 이들에게는 경기력 부족으로 답답한 느낌을 주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게임하는 이들은 절박하고 치열한 승부를 했으리라. 그들은 쉬러 가고 나의 하루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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