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궁에서 온 그 남자 (프롤로그)
1. 프롤로그
용궁에서 온 그 남자를 본 적이 있는가?
그는 작고 가늘게 째진 눈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다. 아마 당신도 한번쯤은 용궁에서 온 그 남자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보기 드문 우물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이것저것 캐묻기도 하고 치기에 가득 찬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겠는가?
라디오를 켜보라.
그의 목소리는 새되고 날카롭기 때문에 라디오 주파수에 전파간섭을 일으키곤 한다.
쉿! 라디오 볼륨을 올려보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2.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유난히도 가물었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무료한 시간을 메우려고 아침 일찍 종묘 앞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오뉴월 아침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공원은 늘 그렇듯 이미 늙은 발록구니들로 들어차 있었다.
나무그늘 아래에선 으레 먼저 온 축들과 나중에 끼어든 패들 사이에 밀고밀치는 맹렬한 말승강이가 벌어졌다. 이놈저놈 퍼붓는 욕설과 거기에 제꺼덕 응수하는 고함소리, 그에 질세라 그악스레 울어대는 매미 소리까지, 공원은 떠나갈 듯 시끄러웠다. 귀가 윙윙 울리고 현기증이 일었다.
빈속에 더위 탓인지 목구멍에선 쓴 침까지 넘어왔다.
한여름의 햇살도 피하고 요기도 할 요량으로 서둘러 근처 한 선술집에 찾아들었다. 그곳도 늙은이들로 소란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들큼한 술 냄새와 생선비린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술주정 소리가 한데 어울려 묘한 생기가 돌았다. 낡고 말라비틀어진 늙다리의 위장도 활기를 띠는 지 연방 꼬르륵 소리를 냈다.
입 안에선 침이 괴고 바짝 입맛이 당겨왔다.
나는 군침을 삼켜대며 앉을 자리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석 쪽에 웬 중년의 남자가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마침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나는 얼른 좁은 통로를 비집고 술청 안으로 기어들었다. 그런데 막상 가서보니 빈 의자엔 배낭하나가 떡하니 올라앉아 있었다.
너덜너덜 해지고 싯누렇게 변색된 원통형의 군용 더플 백이었다. 빵빵하니 제법 묵직해 보이는 것이 늙은이들은 걸멜 엄두조차 못 낼 듯싶었다.
내 시선은 자연 중년의 남자에게로 꽂혔다. 떡 벌어진 어깨판으로 보아하니 더플 백은 그의 것임이 분명했다.
부러 그의 뒤통수에 대고 두어 번 헛기침을 놓았다.
그가 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마지못한 듯 배낭을 집어 툭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곤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발끈 화가 치밀었다.
늙은이가 마땅한 앉을 자리가 없어서 의자 좀 내어달란 것을 젊디 젊은것이 뻣뻣하게 구는 품이 아니꼽고 괘씸했다. 한마디 따끔하게 쏘아붙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그 말을 삼켰다.
혈기 왕성한 젊은 놈한테 충고랍시고 잔소릴 했다가 괜히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었다.
요새 젊은 것들은 으레 그러려니 애써 분을 삭이며 나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대신 “손님이 왔으면 얼른 주문을 받아야지.”하고 애꿎은 주인에게 성깔을 부렸다.
“개안하게 탁배기 한 사발 드실라요?”
호호백발의 노파가 앞니 빠진 입을 히죽이며 내게 막걸리를 권했다.
난 고개만 까딱하고는 동태찌개 하나를 시켰다.
주인 노파는 곧장 자신의 잇몸처럼 듬성듬성 이가 빠진 사기그릇에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뒤이어 동태 토막을 넣고 끓인 찌개냄비와 고봉으로 꾹꾹 눌러 담은 하얀 쌀밥을 내왔다.
나는 우선 막걸리부터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 속에서 시큼털털한 것이 솟고 시장기가 몰려왔다.
걸신에 홀린 듯 밥을 그릇째 찌개 냄비에 들어부었다. 그런 다음 맛있게 밥을 비벼 첫술을 막 입에 넣는 참이었다.